오트밀을 포기한 당신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부대찌개나 꿀꿀이죽이 그렇듯이 어느 나라든 가난의 상징으로 통하는 음식이 있다. 일본에는 2차대전 종전 직후 오키나와에서 먹은 모빌 덴뿌라라는 음식이 있다고 한다. 덴뿌라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튀김 음식을 말하는데, 엔진 오일이나 자동차 윤활유같은 폐기름을 요리 기름으로 썼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가볍게는 배탈로 끝날 수 있었지만 심하면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배고픔에 허덕였는지 짐작할 만 하다. 프랑스 부야베스(Bouillabaisse: 마르세유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생선 스튜) 또한 그렇다. 지금은 랑구스틴(Langoustine: 노르웨이 랍스터)같은호화로운 재료를 넣어 요리하기도 하는 등 크게 변모되었지만 원래는 시장에서 팔 수 없는 잡어로 어부들이 소박하게 끓여먹던 수프에서 유래하였다.
그 중 영국에서 가난한 농민 서민들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 먹던 음식이 있는데, 바로 오트밀에 물을 넣어 죽처럼 끓인 포리지(Porridge)다. 오트(Oat)는 귀리를 뜻하는데 시중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트밀은 귀리를 도정한 후 남은 알맹이만 오븐에서 쪄 납작하게 눌러 말린 식재료를 말한다. 밥과 국, 반찬으로 한국식 아침식사를 하며 유년기를 보낸 나에게 사실 오트밀에는 왠지모를 로맨스가 있었다. 해외여행 가서 호텔 조식에나 나올법한 메뉴라고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면 호텔을 숱하게 들락날락하던 승무원 시절에도 아침 뷔페에 오트밀이 준비된 장면이나 오트밀을 먹는 사람들을 본 기억은 없다. 너무나 서민적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굶어죽지 않기 위해 먹던- 식재료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맛있는 메뉴에 정신이 팔린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여러가지 브랜드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퀘이커(Quaker)사의 오트밀이다. 오트밀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조차 아마 이 브랜드를 들어본 적은 있을 것이다. 특히 저 사람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퀘이커 교 아저씨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서 한 번 보면 잘 잊혀지지 않는데, 여느 네덜란드 슈퍼마켓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가장 잘 팔리는 브랜드 중 하나이다.
내가 오트밀을 처음 먹어본 것은 무려 5년은 더 지난 이야기다. 당시의 남자친구가 부기장이었는데 비행 가기 전 시간이 촉박할때면 식사 대신 이 퀘이커에서 나온 인스턴트 오트밀에 우유를 부어 전자렌지에 돌려 먹고 출근하곤 했다. 옆에서 지켜보다가 한 숟갈 떠먹어보았는데 왠걸, 먹어본 적은 없지만 골판지를 물에 담가 며칠 불리면 날 것 같은 맛이었다. 게다가 우유때문에 약간 느끼한 맛까지 추가해서. 어떻게 이런 걸 먹을 수가 있지? 그 후로 오트밀은 내게 자발적인 금기의 식사가 되었고, 다시 도전해 볼 생각 또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슈퍼푸드가 잔뜩 들어간 그린 스무디를 마시거나 일반 요거트 혹은 스키어(Skyr: 유청을 걸러내 꾸덕하지만 부드러운 맛의 아이슬란딕 스타일 요거트)로 다양한 요거트 볼을 만들어 먹는 것이 지난 몇 년 간 나의 아침 고정 메뉴였다.
그러던 중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2주 전쯤 슈퍼에 갔다가 홀린 듯 이 오트밀 박스를 집어들었다. 아마도 코로나로 지루해진 일상에 색다른 아침식사로 변화를 주고 싶었을수도 있고,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큰 축복중의 하나인 망각의 축복이 내게 갑작스런 마법을 행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전에 먹었던 것처럼 따뜻한 죽 같은 포리지를 만드는 순간 다시 한 번 오트밀과 최소 몇 년은 이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나는 구글에 오트밀 조리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중 눈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비주얼을 뽐내는 오버나잇 오트밀(Overnight Oats).
오버나잇 오트밀은 말 그대로 전날 밤 오트밀에 물이나 우유를 넣어 불려두고 다음날 아침 부드러워졌을 때 섞어 먹는 것을 말한다. 기본 뼈대는 이것이 전부지만 각자의 기호와 상상력을 더해 다양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일단 나는 오트밀을 불릴 때 소 우유 대신 귀리 우유를 사용한다. 카푸치노와 라떼를 즐기지만 사실 커피에도 소 우유를 넣지 않고 코코넛이나 아몬드, 귀리 우유 등 우유 대체품을 사용한지 오래 되었다. 20대 때는 잘 느끼지 못했던 소 우유 특유의 느끼함이 없고 속도 편하기 때문이다. 또 치아씨드를 한 티스푼정도 넣어주는데, 밤새 오트밀과 함께 불면서 젤리같은 식감을 더하고 먹을때는 씨가 오독오독 씹는 맛을 더해주기도 힌다.
토핑으로는 사과를 잘라 넣고 시나몬 가루를 뿌리는 방법이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로 보여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오트밀 자체가 워낙 부드러운 맛이라 산도가 높은 과일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특히나 유럽의 사과는 한국처럼 달지 않고 훨씬 단단면서 새콤한 편이라 더욱 겉도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토핑은 달콤한 바나나와 블루베리다. 바나나를 잘라 넣고 블루베리를 곁들인 후 호두와 캐슈넛을 가운데에 얹는다. 꿀을 뿌리고 시나몬 가루를 톡톡 떨어뜨려주면 완성이다. 이 외에도 아몬드 우유로 오트밀을 불리고 그 위에 말린 코코넛칩과 바나나로 토핑을 하는 방법 혹은 피넛버터에 달지 않은 잼을 얹고 베리류 과일을 섞어 먹는 방법도 있다. 어떤 재료를 넣어도 좋지만, 이처럼 이미 잘 알려진 맛의 조합을 응용하면 큰 실패없이 창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생각보다 포만감이 엄청나서 아침에 먹고 나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밥 생각이 나지 않는데다가 하루종일 햇빛이 뜨거운 유럽의 여름을 보내기에 더없이 완벽한 식사라 매일 이렇게 먹고 있다. 그 단순하면서도 건강하고 싱그러운 맛에 매료되어 매일 쓰는 감사일기에 꼭 한번씩 언급하는 정도라, 내가 대체 언제부터 오트밀을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나 하고 머리를 긁적이게 된다. 역시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엇이든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다.
출처:
http://www.thedefinitearticle.org/cuisine/dont-mention-the-war-but-lets-talk-about-the-food
https://en.wikipedia.org/wiki/Bouillabais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