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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씨 Oct 28. 2022

4. 의심과 공존하는 것이 디폴트값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확신을 갖고 싶어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확신, 일과 나 사이의 확신, 신앙과 믿음 사이의 확신 등 언제나 확신에 목말라 있다. 하지만 갈증의 정도에 비해 확신이란 녀석은 우리에게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럴 것이 확신은 때론 전혀 다른 현실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99% 확률로 비를 예보하지만 실제로 비가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비가 올 확률이 1%(비가 오지 않을 확률 99%) 라지만 느닺없이 소나기가 오기도 한다.  99%와 1%의 확률 사이에 많은 숫자만큼 다양한 현실존재하진 않는다. 그저 비가 오는 것과 오지 않는 두 가지 결과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린 끊임없이 확신의 정도를 묻고 또 스스로에게도 묻는다. 이쯤 되면 확률이 현실을 맞추고 있는 건지 현실이 확률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게 사실이다.


의심이 괴로웠던 아이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꽤 오랜 시간 교회를 다녔던 기억이 있다. 백지상태의 내 머릿속에 신앙의 씨앗이 자랄 수 있었던 건 나를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였다. 그렇게 시작된 신앙생활은 내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이 깊어질수록. 신앙이 자랄수록. 의심의 깊이도 깊어져만 갔다. 힘이 세질수록 싸워야 할 무림의 고수가 늘어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시련은 신에 대한 의심과 공존할 수 없는 믿음 그 자체였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 사후세계에 대한 의심, 신의 공정과 정의에 대한 의심. 이런 것들로 의심을 잠재우지 못하는 나는 수없이 많은 날들을 자악하며 원망해야 했다. 모든 게 못된 내 마음의 문제라고 자신을 탓하며 말이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에서 의심 많은 내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거..


의심은 인간의 기본값이다.

 자유는 무엇일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 구절은 나에게 오래된 화석처럼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오히려 내게 있어서 진정한 자유는 '의심 많은 인간'의 당연함을 깨닫는 날이었다. 매 순간 확신을 강요하는 주변인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힘을 잃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 스스로를 부정하며 살아온 세월이 허무해지는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행복했다. 진짜 나 자신을 알게 된 거니까. 내 속에 나와 마주하게 된 거니까. 사람들의 믿음은 바람앞에 촛불과 같다. 바람이 없을 땐 믿음이 굳건하지만 바람이 불면 촛불은 위태로워진다. 촛농이 불량이어서도 아니고 촛불이 의지가 약해서도 아니다. 그저 바람이 촛불을 흔들리게 할 뿐이다. 누구나 마음과 생각이 일치되지 않는 모순된 순간들이 있다. 오류는 의심의 행태로 발현된다. 우리는 그렇게 의심과 공존하는 당연한 존재인 거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누군가 물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저 고백하자면 난 절대자의  부재를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부재의 의심이 곧바로 존재의 확신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사회 속에 어느 편에 서기를 끊임없이 강요당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과거의 스스로가 납득이 되어 그의 존재를 믿었다 하더라도 존재를 부정하는 반례는 항상 공존해 왔다. 신이 논리로 증명되는 존재가 아니라면 논리와 이성으로 판단하는 우리 뇌는 절대자의 작품의 아닐 수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를 설계한 조물주가 아니라면 그 신을 믿어야 하는 걸까? 신을 믿는데 믿음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하다면 논리로 증명되는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닌 것인가. 그렇다고 우리의 믿음이 내세를 보장받을 만큼 그렇게 견고한 것인가?  의. 심. 없.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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