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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지방이 Jun 02. 2024

물에 적신 연필

 한 해의 절반이 지났다. 나는 올해 들어 가장 집중력이 얕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 연필을 물에 적신 채 글을 써 내려가는 기분이다.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봐도 희미한 흔적뿐이다. 정신이 맑고 뾰족하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을 움직이고 혼자 있어야 한다. 연필을 햇볕에 바짝 말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밍숭맹숭 흐리멍텅한 사유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할 테다. 나는 애써 핑계를 댄다. 지금의 나는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지금 내 정신은 물통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직장을 다니며 글을 썼다는 드라마 작가나 소설가들의 케이스를 가끔 본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경외심이 든다. 게으른 내가 부끄럽고 가끔은 질투도 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금하다. 그들의 내면에는 어떤 동력이 있는지. 아마 세상에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리라. 그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닿을지 아닐지는 상관없을 것이다. 그저 그들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쥐어짜는 이야기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이야기. 직장을 다니며 글쓰기를 병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무언가 있지 않을까. 무언가를 꼭 풀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지친 그들을 책상 앞에 앉히지 않을까. 물통에 잠긴 그들의 연필을 꺼내어 바짝 말리지 않을까. 나는 괜히 그런 환상을 가진다. 막상 들어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언제쯤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길지 모르겠다. 그런 게 생기는 순간 비로소  물통에 잠긴 연필을 세상밖으로 끄집어낼 용기가 생길 듯하다. 나무가 썩기 전에 얼른 끄집어 내야 할 텐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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