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호랑이 Oct 01. 2016

설렘과 외로움의 줄다리기


07.

결국 밤새 뒤척이다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피곤하기는커녕 내 몸의 모든 세포가 방방 뛰고 있는 것처럼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조식을 먹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 한국에서 그러했듯 모든 종류의 음식을 하나씩 접시에 담았다. 여행객들이 하나둘 내려오더니 접시에 치즈 한 장, 빵 한 조각을 담아 자리에 앉았다. 네 명이 같이 앉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이 내가 혼자 가져온 음식보다 적었다. 

'나보다 저렇게 큰데, 저 정도만 먹고도 생활이 가능한가?'

문득 차고 넘치는 내 접시가 쑥스러워 재빠르게 입 속에 집어넣었다. 


버터와 잼이 정말 앙증맞았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거리로 나갔다. 밤에 보았던 스산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동화 속 나라에 온 것 같았다. 레스토랑은 벌써 예쁘게 장식된 꽃이 놓인 테이블을 깔며 아침을 열고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건물 하나하나가 예술작품이었다. 아이폰으로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어도 화보처럼 나왔다.  



목적지 없이 발이 이끄는 대로 골목을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다. 누군가에게 이 감동을 전하고 싶어 보이스톡으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 건물들 정말 너무너무 예뻐. 나중에 이렇게 예쁜 건물에서 살고 싶다. 흐드러진 꽃으로 장식된 큰 창문이 있고, 테라스가 있어서 아침이면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날씨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집."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거리를 걷는데 문득 한국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수만 리 떨어져 있는 남자친구 목소리를 들으니 왜 혼자 왔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전화가 아니라 같이 있으면 좋을 텐데.'

숨 막히게 아름다운 도시에서 느끼는 설렘과 그 속에 완전히 혼자라는 고독감이 뒤엉켜 어지러웠다. 

'안 되겠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자.'



08. 

프라하 택시기사가 알려준 Red Umbrella 투어가 생각났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빨간 우산을 든 가이드가 공짜로 투어를 시켜준다고 했다. 건물 이름이나 기원에 대해 설명 듣고 사진만 찍고 지나가는 관광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구시가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기저기 빨간 우산을 든 가이드들이 광장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중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성이 Prague Airport라는 문구가 새겨진 우산을 들고 있어 가까이 다가갔다.

"11시부터 투어 시작합니다. 다들 모여주세요!"

The tour starts at 11. Everybody gather together please!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여기서도 동양인 여자, 그것도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정하게 손잡고 있는 연인,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사진 찍으며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지만, 행복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 덩달아 행복감이 차올랐다. 


여행은 그랬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있다는 설렘, 학교나 직장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돌아가는 해방감이 좋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행복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게 제일 좋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 중에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 퀭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직장 동료, 쉬는 날 없이 자기계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욕심에 아등바등 노력하는 나를 고스란히 남겨두고, 여행지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과 함께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여행인 것 같다.



09. 

"아휴, 저 여자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니까."

I can't understand a word she's saying.

노부부의 대화를 들으며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가이드의 발음이 알아듣기 힘들어 귀를 쫑긋 세우며 듣고 있는데, 남편에게 귀엽게 투덜대는 할머니의 말에 빵 터졌다. 결국 설명 듣는 건 포기하고 맨 뒤에서 천천히 무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건물에 어떤 역사가 깃들어 있는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그 모습 자체로 경이로웠다. 


흠... 이것도 뭔가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겠지
어차피 당일에 숙소를 예약했던 하루살이 여행, 프라하에만 쭉 머무를까 고민하게 만들었던 광경
틈새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신기
핑크색 건물이라니, 너무 예쁘잖아
"으악, 구린내!" 코를 틀어막는데 내 몸집 3배쯤 되어 보이는 말이 지나갔다. 옆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 채. 고개 숙인 말이 끄는 마차는 타지 못할 것 같다. 
[뒤꽁무니를 따라가며]  좀 더 구경하고 싶은데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들 놓칠세라 뒤쫓아가기 바빴다.


두 시간이 넘어가자 몸이 지치기 시작했다. 

'아, 왜 이렇게 길어. 언제 끝나는 거야. 그냥 빠져나갈까?'

누가 붙잡는 것도 아닌데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지 못했다. 무리 속에서도 혼자였지만, 진짜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웠다. 그때 가이드가 소리쳤다.

"한 시간 동안 점심시간 가지고 다시 모일게요!"

Guys, have lunch and we'll meet here in one hour!


"헤이, 꼬마 아가씨. 혼자 온 거야? 우리랑 같이 점심 먹을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누군가 혼자 있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알고 있는 맛집도 없었고, 아침으로 4인분 이상 먹었더니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뭐가 됐든 혼자 가보자.'


오전 내내 설렘과 외로움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다.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려고 하면 다시 반대쪽이 끌어당겨 마음 상태가 수십 번 바뀌었다. 나쁘지만은 않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안고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104 유로 호텔에서의 첫날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