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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호랑이 Oct 03. 2016

여행자의 특권


25.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하루 더 묵기로 결정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한눈에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호스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반가운 마음에 이번에도 무작정 먼저 말을 걸었다.

"한국인 맞으시죠? 커플이 같이 오셨나 봐요."

내가 던진 말에 서로 쳐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커플 아니에요. 여행 커뮤니티 통해서 오늘 처음 만났어요. 하하. 제가 체스키 크룸로프 같이 갈 사람 찾는다는 글 올렸거든요."

오호. 커뮤니티에서 함께 여행할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아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세 명이서 같이 식사나 하자며 호스텔을 나섰다.


스보르노스티 중앙 광장 여기가 체코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중국인이 많았다. 다음으로 많은 게 한국사람. 광장을 한 바퀴 돌며 뭘 먹을까 고민하다 Zlaty Andel 호텔에 자리 잡고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전 할아버지 사업 도와드리고 있어요. 직업은 특이해서 말씀드리기 어렵고요, 회사 사정으로 3개월 휴식시간이 생긴 걸 알자마자 곧바로 유럽으로 날아왔어요. 외국 친구들도 많이 만들고, 현지 사람들 초대로 파티도 하고, 죽을 뻔한 경험도 했어요. 다음 주면 한국 돌아가는데, 원하는 건 다 해봐서 후회는 없네요."

언제 다듬었는지 알 수 없는 부스스한 곱슬머리에 히피 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후계자(?)라니 믿기지 않았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정장 입은 사진을 보여주며 어엿한 직장인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전 여행 시작한 지 이제 2주 됐고요, 앞으로 2개월 동안 더 여행할 생각이에요.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프라하에 오래 머물러서 벌써부터 일정이 좀 틀어지긴 했는데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아요. 무조건 부지런히 다니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그곳에서 원하는 만큼 머무는 여행이 더 의미 있는 거 같거든요."

앳돼 보이는 여자가 조고 조곤 자신의 여행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똘망똘망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회사, 결혼, 승진 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돈은 얼마나 많이 벌고, 나보다 얼마나 잘나고 못났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여행자들의 모든 초점은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어디에 가고 싶은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나는 그들이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와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얼마나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26.

식사를 마치고 자유시간을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러 관광객이 보이지 않는 골목만 골라 걷고 있는데, 검은 고양이가 갈색 울타리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에서 개나 고양이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를 보고 달아날까 봐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데, 내 오른쪽 다리에 등을 비비며 한껏 애교를 부리더니 고개를 들어 눈빛 교환 한 번 해주고 울타리 사이로 다시 사라졌다. 다리에 남은 온기는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것 같았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체스키 크룸로프 성이 나타났다. 언덕을 올라갈수록 점점 쌀쌀해지더니 손끝에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성벽을 따라 걷다보니 아치형 구멍 사이로 울긋불긋한 지붕들이 빼꼼히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전망대에 다다랐을 때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한 폭의 그림을 옮겨놓은 것 같은 장관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이번에는 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오른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활한 대지는, 어서 와서 안기라는 듯 시원하게 쭉 뻗어 있었다. 미친 척하고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아이들이 알프스 산맥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뛰어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27.

세 시간 동안 구서구석 돌아 다녔더니 웬만한 골목은 벌써 눈에 익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앙증맞은 요정들이 사는 마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웠지만, 내 마음은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잘츠부르크로 떠나는 벤을 예약해 달라고? 하루 더 묵는다고 하지 않았니?"

호스텔 직원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응.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내일 아침에 떠나고 싶어졌거든."

변덕이 죽 끓듯 계획을 변경하는 것도 여행자의 특권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나도 서서히 내가 이 순간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여행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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