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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연희 Feb 01. 2017

보온병에 담긴 커피같은 - 쇼코의 미소, 최은영

혼자 있고 싶은 순간 다시 생각날 단편 소설

쇼코의 미소를 작년 가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서평을 적는다. 첫 번째 이유는 아껴서 읽고 싶은 마음에 끝까지 마무리하기 싫었음이고, 두 번째 이유는 서평을 쓸 여유가 이제서야 생겨서다.

책에 대한 인상은 익히 알려진대로다. '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 쇼코의 미소를 형용하는 가장 적절한 평가였다. 화려한 수식어가 사용되진 않는다. 그 어떤 감각적인 문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가 있나하는 감탄을 내뱉게 된다. 이 문장을, 이 문장들이 모인 문단과, 단편 하나 하나를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어서 그렇게나 아껴서 읽었다.

서영채 문학평론가는 말했다. 신인의 등단작임에도 불구하고 문장에 기교가 없다고 말이다. 보통의 신인이라면 눈에 띄기 위해 혹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기교를 부리고 소위 오버를 한단다. 하지만 이건 최은영 작가에게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란다. 그녀의 다음 작품에서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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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 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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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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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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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회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그 일에 대해서 영원히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그런 엄마에게 드디어 정신을 차렷냐고, 다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도 엄마의 내상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건 엄마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누구도 그 일로 엄마가 다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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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날 이후로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엄마가 그 일에 대해 내뱉었던 그 순진했던 모든 말들과 이상주의에 기댄 세상에 대한 몰이해가 부끄러웠고, 세상의 단단함이, 상식으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그 단단한 벽이 엄마를 침묵하게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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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마나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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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한지가 나를 피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지는 이제 나를 피하고 있고,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한지를 괴롭히는 일이 될 것이었다. 나는 그애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사과를 하든, 어찌된 일이냐고 따져 묻든 그건 모두 잘못된 일이었다. 사람들은 떠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나는 나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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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선배의 끝없는 관심과 조언이 고마웠지만 그 고마움만큼이나 불쾌감도 커졌다. 선배가 '나'의 테두리를 짓밟고, '나'라는 공간을 무례하게 침입하는 것 같았다. 

※ 구분하여 쓰지는 않았지만, 위에 적은 문장들은 모두 다른 단편에서 발췌했다. 쇼코의 미소는 총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있고 가장 처음으로 실린 단편의 제목만 쇼코의 미소일 뿐이다.


7편의 단편을 관통하는 건 '가족'이다.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경우에는 '관계'라는 키워드가 자리를 대신한다. 최은영 소설가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지 궁금하다. 어떤 가정에서 성장했기에 가족 서사를 이렇게 뜨끈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걸까. 마치 보온병에 담긴 것마냥 딱 그 정도의 온기.

발췌한 구절을 읽으면 알 수 있듯,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다소간의 우울증세를 보인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는 진부한 진리처럼 인물들에겐 모두 개인사가 있고 그로인한 우울감을 느낀다. 혹은 인물이 죽음에까지 이르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하고 맑은' 이라는 수식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게 바로 최은영 작가의, 나아가 그녀의 등단작의 가치가 아닐까.

소설 속 화자의 생각과 작가의 가치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7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최은영 작가의 결정체이기를 바란다. 인물들의 대사 중 평소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퍽 많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혹은 관계를 정의하는 규정 말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조금 시니컬한건 맞는데, 솔직히 상대적으로 '관계'에 대한 고민을 많은 편은 아니다. 인간관계를 가장 큰 고민 혹은 골칫거리로 꼽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왠일인지 나는 그에 대해 신경을 쓰질 않는 편이다. 나의 오랜 친구는 내게 눈치가 없는게 아니라 눈치를 '안'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엔 본인도 그렇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당당하게 적당한 거리를 요구한다. 이래서 연애를 못하고 안하는가보다.

보통은 미움 혹은 무관심을 두려워하는 유형이 유독 관계에 고민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눈치를 보고 또 지나치게 의식해서 행동하는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사실 그깟 미움 좀 받아도 넌 여전히 괜찮은 사람인데 말이다. 아무튼, 이런 점에서라면 최은영 작가와 나는 엄연히 다르다. 충분한 시간동안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 시간 속에서 바로 이 등단작이 결정을 이루었겠지. 그렇담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난 아마도 평생 이렇게 사람냄새나는 글은 못쓰겠지 싶다.

소설을 통한 인물 분석은 여전히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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