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두 동생들에게
어쩌면 이번 뉴욕은, 우리 세 자매가 자유롭게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작년 부부의 연을 맺은 둘째의 임신 계획대로라면 나는 내년에 이모가 될 가능성이 높다. 엄마로서의 삶을 맞이한다는 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삶의 궤도로 진입한다는 의미니 아마 그 궤도 위에서 세 자매의 시간을 찾는 일이란 여간 쉽지 않겠지. 우리는 아직 가야할 곳들이 많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를 수도 있어! 라고 말은 해보지만 우리는 자연스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이 좋은 세 자매가 뉴욕의 concrete jungle을 걸으며 함께 하는 여행, 남들의 부러움을 잔뜩 산 이 여행에서 내가 느낀 코어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누구보다 막역한 사이지만 온전하게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할 땐, 잠깐 만났을 때 각자의 현재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이번 여행이 유독 내게 그랬다. 이전보다 더 성숙하고 따뜻한 동생들의 말과 행동에 부족한 나의 마음과 행동을 비춰보며 거리감과 어색함을 느끼기도 했고,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이 아까운 순간들 속에서도 괴리감 때문에 몰입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생기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순간순간 날이 잔뜩 서있는 나를 적나라하게 마주했다. 그런 나를 보며 스스로 당황스러워 동생들에게 말도 꺼내지 못했다.
뉴욕 여행의 말미에는 떨어져 살다 보면 결국 어쩔 수 없나 보다고, 이렇게 우리 자매도 조금씩 멀어질 수 있는 가보다고,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고 자매 관계도 인간 관계기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고 이제는 우리가 헤어질 때도 이전처럼 슬프진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미운 마음. 배배 꼬였다. 심지어 나는 이 꼬인 마음들을 마주하고 푸는 게 아니라 여행 마지막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다. 이 미운 마음을 숨겨 안고 얼른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근데 이렇게 돌아가면 내 곁에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What the heck is wrong with me?
그 마음은 신기하게도 동생들이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넘어오면서 바람이 실어가버렸다. 샌프란에서 부는 바람은 딱 가을 바람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 안그래도 더위에 가장 취약한 난데 뉴욕이 너무 더웠던 걸까, 보고 듣고 먹고 싶은 것이 많아 여유가 없던 일정 탓이었을까, 그냥 내가 대도시와 맞지 않는 걸까. 무튼 정말 별다른 이유 없이 애쓰지 않고도 꼬일대로 꼬인 마음이 자연스레 풀렸다. 뉴욕과는 달리 시선을 굳이 위로 가져가지 않아도 넓게 펼쳐진 하늘 아래 동생들과 보내는 시간이 무해하게 즐거웠고, 순간순간이 아쉬웠다.
날씨도 날씨고 대도시와는 정반대 무드의 여유로움도 한 몫 하겠으나, 지구 저편으로 돌아온 지금 돌이켜 보면 끝내 불편했던 동생들의 행동 이면에 동생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나의 눈과 마음으로 조각들을 직접 맞춰보았고 결국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샌프란에서는 약 3일 밖에 있지 않았으나 두 동생들과 제부, 제부의 가족들, 그리고 지인들과 인사하고 시간을 보내며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들이 보였다. 단순하게 보이는 것 너머의 삶. 새삼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우리 삶의 전제는, 나의 삶은 한국에 있고 동생들의 삶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두 동생에게 이해하지 못했고 답답했던 점들은 모두 우리는 모두 같은 곳에서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나의 낡고 익숙한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없는 이곳에서 두 동생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삶의 장면 속을 함께 걸어보고 나서야 알겠다. 동생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게 행복과 감사를 꾸리며 살고 있다.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 동생들을 아껴주고 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동생들이 아끼고 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다. 그녀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외국인으로 살아가며 수많은 고민과 시련이 있지만, 종교 안에서 두 동생은 이를 받아 들이고 사랑과 지혜로 길러내고 있다. 가끔 한국에 올 수 있고, 엄마아빠와 내가 미국으로 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된 것 같다. 그 외에 ‘이래야 하지 않을까’, ‘저게 좋지 않을까’는 순전히 나의 삶 속에서 잣대를 들이대는 일. 동생들이 한국을 떠난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이를 조금씩 받아들인다. 늦었다기 보다는 이제야 내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는 의미겠지. 다행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마지막 날에는 막내가 다니는 교회 예배에 다같이 참석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를 둔 엄마아빠의 기도제목 1순위, ‘연희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를 의식하기에, 가족들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게 되는 날엔 자아의 몸집을 의도적으로 부풀리며 한쪽 다리를 꼬곤 했다. 이날은 좀 달랐다. 여기까지 와서 부러 경계할 필요는 뭐 있냐며, 노래를 따라부르진 않아도 함께 박수를 치며 찬양 노래 가사를 읽어 보았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내 모든 기도는 사랑의 노래가 되네.’ 이상하게 이 구절을 읽자마자 눈물이 차올라 나는 찬양 시간 내내 머쓱하게 눈물을 닦아내었다. 눈물 흘리는 행위가 이상하지 않은 장소임에 애써 참지 않고 조용히 흘려 보냈다. 이해와 반성, 미안함과 감사함으로부터 비롯된 눈물이었으므로. 그리고 몇 년만에 진심으로 기도를 드렸다.
‘미운 마음 다 버리고 사랑으로 흘러 넘치게 해주세요. 사랑으로, 지혜롭게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연수와 태연이는 양 옆에서 나를 조용히, 작게 다독여주었으나 끝내 내게 왜 울었냐고 묻진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살 수도, 저기에서 살 수도 있다. 함께 살 수도, 따로 살 수도 있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 여행이었을 수도 있다. 이번 여행으로 인해 그런 건 이제 아주 조금 덜 중요해졌다. 다만, 동생들에게 “거기서 행복하니?”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다면, 나의 잣대가 아닌 각자의 기준으로 삶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각자 어디에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었다. 내가 동생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