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Dana and Dana Point
날씨가 참 좋다. 여기 로스앤젤레스는 대체로 하늘이 맑고 그 아래로 바람이 잔잔하게 이동한다. 푸른 하늘이 아니라면 가끔은 옅은 잿빛이 돌 때도 있다. 아주 가끔, 그러니까 일 년에 손꼽을 정도로 가끔은, 비가 내리기도 하는데 그럴 땐 천사의 땅(Los Angeles는”The Angels”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의 거주민들은 광야에서 만나가 내렸을 때의 이스라엘인들처럼 기뻐한다.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젖시는 비는 내 영혼을 젖시는 것 마냥 반갑고 고맙기까지 하다.
오늘은 바다 같은 하늘이 넓게 드리우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자니 이런 날은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바다를 보러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캘리포니아에는 서부의 해안을 따라 아름다운 해변들이 줄지어있다. 클램 차우더가 너무 맛있었던 샌프란시스코의 항구, 몇 년 전 아빠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 가족 넷이 함께 들려서 더 좋았던 말리부(Malibu),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산타모니카(Santa Monica), 보드나 자전거로 자유히 횡단하는 히피들의 여유가 느껴지던 베니스(Venice), 작은 항구에 있는 것은 아닌지 기분 좋게 혼돈케 하는 마리나 델 레이(Marina del Rey), 절벽 아래의 바다를 깊이 즐길 수 있는 팔로스 베르데스(PalosVerdes). 그리고 엘에이에서 두 시간 정도 샌디에고로 내려가는 길의 줄지은 이름 모를 해변들. 제각기 특색이 다른 해변들을 다 가보는 것이 엘에이에서 살 때 내 소박한 위시리스트(Wish List)였기도 했다. 나름 많은 해변의 바다에 발을 담가보았다. 모래 아래로 몸이 스르르 잠기게끔 하여 파도가 밀려 들어오는 소리를 듣는 즐거움과 쉼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종종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던, 캘리포니아에 산다면 가봐야 한다는 꽤나 저명한 라구나비치(Laguna Beach)를 여태껏 가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볼 곳들을 나열해 보았었는데 그중 1순위로 이 곳을 적었었다. 그리고 오늘 그곳을 들리리라.
핸드폰으로 구글 맵을 보며 오늘 갈 곳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리스트의 2순위도 오늘 들릴 수 있겠는데?’하는 질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라구나 비치에서 차로 약 15분 정도 아래로 내려가면 다나 포인트(Dana Point)라는 항구 도시가 있다. 이 곳을 들리는 날이 오늘일지도 모른다. 1960년대 지어진 다나 포인트는 배로 약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카탈리나 아일랜드로 가는 길의 출발지이며 근처에 비교적 덜 알려진 Capistrano Beach가 있다. 그 장소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 꼭 가야 하는 관광지로는 알려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오히려 로컬 사람들이 바다 옆에 앉아 해산물을 먹기 위해 가는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로컬인도 아닌데 굳이 이곳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이름 때문이다. “다나” 포인트. 사실 “다나”는 엄마의 영어 이름이다. 그래서 이 도시로 끌렸던 것이고 이곳을 방문하기로 결정한 유일한 이유다. 엄마와 이름이 같다는 점은 그 항구로 하여금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감으로 친숙하게 다가오게끔 한다. 가보지도 않은 곳이 단지 이름 때문에 이러한 매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이지 않은가? 그러다가도 그런 특별한 곳에 마침내 도착하고 나면 한동안의 친숙함이 어느새 새로움과 신비로움으로 탈바꿈하여 있다는 것은 이름의 두 번째 매력 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엄마는 어떻게 하다가 “다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냐에 대한 스토리를 이미 들었던 것으로 아는데 공교롭게도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어느 보통날 엄마는 Dana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고 한눈에—정확히는 한 귀에—반하여 그 날로 본인에게 영어 이름이 생겼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이름을 애지중지하며 즐겨 사용하고 있다.
그런 엄마의 딸인 나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으로 넘어간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한국 토박이 중학생이었던 난 고등학생이 채 되기도 전, 확고한 대학 목표가 있었다. “Dream School”을 정한 것인데, 나의 선택은 하버드(Harvard)와 경쟁상대로 보이는 프린스턴(Princeton)이었다. 꿈을 크게 가지자는 신념이 있었기도 했지만, 하버드가 아닌 프린스턴을 정했던 이유는 그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 당시 왜 내가 그 이름에 그렇게 매력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Prince가 사는 town을 꿈꿨던 것이었는지 알바가 없다. 이쁘다는 이름으로 그때부터 내 드림스쿨은 프린스턴이었으며 내가 12학년 대학원서를 넣을 때 early admission으로 넣은 학교이기도 했다.
변덕을 잘 부릴 줄 아는 나인데, 한 이름이 나에게 영향이 되었고 자극이 되었다. 내 학창 시절의 “드림”은 “드림”으로 끝났지만, 그때의 기억을 기분 좋게 지금도 꿀 수가 있다. 엄마의 “다나”라는 이름도 훗날 언제 어디서 다른 이름으로 교체가 될지언정, 지금의 엄마 또한 그 이름을 소유하게 된 기막힌 유래를 기분 좋게 떠올릴 것 같다.
우리에게 이런 닮은 모습이 있다니... 이름에 관하여 다른 이야기거리 하나가 더 떠오른다. 다나 포인트로 가기 전, 하나 더 하고 가자. (다음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