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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Jul 18. 2019

그라운딩 육아

현존하는 육아가 나와 아이를 편하게 한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마음과 다르게 버럭하고 소리를 지르게 되곤 한다. 그런데, 버럭질 퍼레이드를 펼쳐서 기분이 우울했던 그제와 달리, 어제와 오늘 아침엔 수용적인 엄마였다. 나는 그게 나의 디폴트 상태이자, 유지해야만 하는 상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근본적인 부분부터 돌아볼 법한 영감을 하나 얻었다.


아침에 아이는 여전히 빙글댔지만, 나는 요령있게 아이를 이끌고 같이 천 휘두르고 춤추며 놀면서 슬렁슬렁 등원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조리사 선생님이 물고기를 귀여워하니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주겠다고 하는 아이를 따라가며 '어린이집 얼른 가야하는데...(얼른 보내고 쉬고 싶다!)'하는 마음이 되는 것도 보았다.  물고기 잡겠다고 긴 풀 뜯어 연못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녀석을 보며 조바심도 들었다. 조심하라고 차분히 이야기하고 잡아는 주지만 손 갈 일, 입 댈 일이 자꾸 생기는 것에 거부감이 드는 상태도 지켜보았다.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내뱉었다.


그래, 이게 뭐라고. 
놀다 가면 되지.


등원길에 놀다 가니까 놀리는 것이랑 다르다. 아이는 연못과 물고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즐기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 함께 있지 못했던거다. 그래서 긴 나뭇가지를 같이 찾아보기로 했다. 긴 것을 찾아서 연못도 휘저어보고, 같이 호기심을 갖고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내 눈에도 연꽃이 들어왔고, 아이와 같이 감탄할 수 있었다. 


연꽃 진짜 이쁘다! 
엄마 저 큰 물고기 진짜 멋지다!


긴 나뭇가지를 비밀 낚시대라 부르며 수풀 뒤에 같이 숨기자고 했다. 다른 사람이 못 보게 숨기자 했더니 왜 그래야하냔다. 혹시 쓰레기인줄 알고 버릴까봐 그렇다며, 잘 놔두고 다음에 또 이걸로 놀자고 했다. 어린이집 가자, 선생님과 친구들이 기다린다, 간식 먹어야지, 공기가 슬퍼서 오래 있으면 우리도 슬프다 따위의 이야기를 할 땐 씨알도 안 먹히더니 이제는 자기가 킥보드 틀어쥐고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마음을 알아주고 잠시라도 같이 있어주고 나오면 자기도 움직일 생각이 드는가보다. 


아이의 욕구를 알아주고 아이의 장에 들어가 같이 하고, 내 관념과 생각이 일으키는 조바심을 일단 멈추어 바라보는 이 모든 과정이 그제의 나와 너무나 달랐다. 그제의 버럭질은 에너지의 폭발과도 같았다. 쌓아두었던 것들이 화산 터지듯 분출한 후엔 소강 상태가 되어 다시 여유를 찾은 셈이다. 그런데 이 패턴에 익숙해지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좋지 않다. 마그마는 계속 차오를 것이고 그때마다 터뜨리다 보면 주기도 짧아진다. 화를 내건 히스테리를 부리건 어떤 식으로든 표출을 해야 속이 풀리기 때문에 그걸 위해서라도 빵 터뜨리는 '의식'을 치르는 버릇이 생긴다. 강도는 점점 심해진다. 꿍쳐뒀다가 터뜨리는 활화산 패턴을 깰 필요가 있다. 이 패턴은 신경계가 각성되어 압도되는 감정에 휘둘려 에너지를 토해내듯 터뜨리는 fight 모드와 관계가 있다. 


어쩌면 그래서 많은 엄마들이 버럭 성질 내다가, 이러면 안되지-하고 반성하고 온갖 책을 보며 다짐하다가, 막상 현장에선 또 빵 터지고 후회하는 루프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후회-반성-공부-실패 의 반복이다. 의지나 정신력, 성품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렇게 몰아가는 것은 개인의 자존감만 깎아낼 뿐이다. 요는, 자기의 거친 에너지를 다루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일 뿐이다. 


내가 뭘 느끼고 있는지, 얼마나 차올라 있는지를 모르면 스스로도 시한폭탄처럼 느낀다. 내게 불을 붙여버릴 주변 상황에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화기엄금이라 써붙이고 다니며 조금만 불티가 튈 것 같으면 기겁을 하고 방어한다. 그 인생엔 멋진 불꽃놀이도, 고요한 촛불도, 따스한 모닥불도 들어설 수가 없다. 내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 자기조절의 시작이다. 일단 선명하게 알아차려야 필요한 것을 스스로에게 제공할 수 있다.



지금 내 기분은 어떠한가? 
나는 주변을 선명하게 인식하는가?
쫓기듯이 조급하게 혹은 정신줄 놓은 듯 멍하게 있지는 않은가?
몸의 어디가 불편한지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 몸의 감각을 묘사할 수 있는가? 


정신적 고찰이나 감정 살피기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내 몸의 상태를 고요하게 살피는 것이 선행되어야 마음도 세심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보니 화가 난다>는 성긴 알아차림이 <아이가 물감을 짜는 것을 보니 더럽힐 것이 걱정되어 조바심이 난다>같이 상황 묘사와 함께 나의 감정이 담긴 알아차림으로 구체화된다. 비폭력대화도 그 과정을 밟는다. 더 나아가면 <내가 편하고 싶은데 아이의 놀이가 일거리를 만들어내니 꺼려지는구나. 지금 아이에게 공감하기 보다 내 불편이 더 신경 쓰일만큼 여유가 없구나.>로 더욱 선명해진다. 


이것이 사후에 자기성찰이나 반성시간, 힐링시간에 일어나는게 아니라 장면을 보고 있는 현장에서 바로 떠오른다. 내 마음을 내가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나의 욕구를 스스로 알아주는 일 속에는 상대의 행위만 있을 뿐 상대에 대한 판단이 없다. 그래서 화가 나지 않게 된다. 거부감이 들더라도 폭발하듯 올라오는게 아니라 대책을 세울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드러난다. 물론 아이는 자기 욕구가 최우선인 존재이기에 대안을 제시해도 바로 예쁘게 말을 듣진 않는다. 그럼에도, 분노 게이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긴장 속에서 혼낼 때에 비하면 일이 해결되는 속도가 빠르고 에너지 소모도 적다. 대책을 세울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중요하다. 엄마도 사람이고, 다양한 상태를 가진다. 일관성 있는 육아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인생이 일관적이지 않은데 엄마가 어떻게 일관된 피드백만을 보이겠는가. 그래서 그럭저럭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면, 전략적인 대책을 생각할 수 있을만큼의 여유가 필요하다. 대책을 세우는 일은 전두엽의 영역이고, 전두엽과 연결되려면 그라운딩은 필수다.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는 묘사는 문자 그대로, 신경계가 각성되어 전두엽과의 연결이 끊어져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제의 버럭질 퍼레이드로, fight 모드의 패턴이 꾸물꾸물 내 뇌에 길을 내는 것을 보았다. 보도블럭 깔고 가로수 심고 벤치 놓기 전에 다른 숲길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 역시 fight 모드의 길이다. 아이의 반감과 내 반감이 부딪히는 현장이 마냥 평화롭기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다 그라운딩된 상태로 날 바라보고, 내 욕구를 바로 보는 훈련이 되면 아이의 욕구 역시 바로 바라보며 물 흐르듯 능숙하게 밀땅을 할 수 있다. 난 아이의 욕구를 잘 읽고 내 욕구를 아예 보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게 꽤 뿌듯할만한 일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 역시 치우침이다. 똑같이 활화산을 키워낸다.




치우침  << 내 욕구만 중요한 < 내 욕구를 잘 아는

                                  << 중도의 균형잡힌 상태 >> 

           상대에 공감적인 > 상대 욕구에만 잘 반응하는 >>반대편 치우침


 내 욕구만 중요한 것의 반대는 잘 공감하는 바람직함이 아니라 반대편 치우침인 상대에게만 잘 반응하는 특성이다. 내 욕구를 잘 알고 상대에게도 공감적인 상태의 중간 어디쯤이 지향해야할 선이다. 우리네 육아 문화는 극단의 치우침 사이에서 혼이 진동하게끔(슈타이너는 아스트랄체의 감정작용을 혼의 진동에 비유했다) 부추긴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당위는 우리를 경직시킨다. 나부터 챙기라는 것은 내 욕구만 중요한 상태에 머무르라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을 좋을대로 해석해서 자기 좋은 것만 하는 엄마들은 이기성의 상태에 있는 것이겠으나, 그 상태는 실제로 아이는 커녕 자기의 욕구도 몰라 일단 내게 편한 것만 찾으려는 땜빵식 행위로 드러난 무지다. 반대로 아이에게 올인하며 맞춰주는 이타적인 엄마 역시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가 잘 될거고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여기는 교만의 상태에 빠져 있다.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교만이다.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면 교만해지기 쉽다. 나도 그 함정에 빠져 있다. 아예 몰라 무의식에 휘둘려 살거나, 다 안다고 자만에 빠져 놓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집착하며 살거나. 그 상태에서 왔다갔다 하며 중간을 찾지 못하는게다. 감정을 가진 인간이 당연히 경험하는 것이니 나쁜게 아니라 모두 과정이고 축복이다. 그렇게 배워나가는게 삶이다. 


나는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의 내 몸의 감각,
내 마음이 일으키는 감정,
시공간을 헤집고 다니는 내 생각 뿐이다.
그리고 아이가 요구하는 것을 보고
그 안의 욕구를 알고 닿기 위해 물어보고,
같이 시도해보는 것이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앞으로 열불날 일이 태산같을텐데, 화산 터뜨리는 길을 내서 내 인생을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길을 차곡차곡 내봐야겠다. 아마 그 모습은 일전에 발견한 야트막한 숲산책길처럼 아담하고 고요하며, 산딸기가 군데군데 핀 귀여운 길일거다. 그렇게 이미지 트레이닝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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