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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Mar 15. 2020

코로나 19를 바라보는 조금 다른 눈

바이러스는 미생물이다. 스스로 생명활동을 할 수 없어 숙주의 세포가 가진 생명활동 능력을 활용해야 한다. 생명체의 세포에는 단백질을 합성하는 리보솜이라는 기관이 있다.


동글동글 붙은게 리보솜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는 바이러스는 DNA만 가지고 있거나 RNA만 가지고 있어 스스로 복제할 수가 없다. 그런 주제(?)에 남의 단백질 공장에 쳐들어가서 자기를 위한 생산 시스템을 가동시키다니 의식도 영혼도 없는 존재가 어떻게 저런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계 모든 존재가 생육과 번성을 추구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단 말인가. 하긴, 새끼를 낳는 육체적 번식이 아니더라도, 특히나 인간은 자기 생각을 낳아 퍼뜨려 영향을 주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정신의 번식이지 뭐.

코로나 바이러스는 RNA 바이러스 계열로, 동물이나 인간 등 숙주 몸에 들어가 세포 내 리보솜을 가동해 자기 유전정보를 찍어낸다. RNA는 DNA와 달리 <어떻게>라는 방법 정보를 가지고 있다. DNA가 쌍꺼풀 눈, 까만 머리 등 완제품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RNA는 자기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조립하는 방법만 들고 있는 설계도다. 레고로 치면 완제품 사진도 뭣도 없이 부분 부분 조각 맞추는 매뉴얼을 들고 있달까. 코로나 같은 RNA 바이러스는 숙주에 들어가 설계도대로 단백질을 꼬약꼬약 만들어주는 리보솜을 훔쳐 쓰는 셈이다. 자기 힘으로는 못하니 남의 자원을 자기 것인 양 써버린다. 면역 세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껍질을 쓰고 들어가서 들키지 않도록 공장에 슬쩍 설계도만 들이미는 얄미운 녀석이다. 숙주 입장에서야 얄밉지만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유일한 생존법이다.

DNA는 자기의 설계도 코드 앞뒤에 일종의 태그를 붙이고 있고 복제하는 과정에서도 짝을 지어 서로 검증하는 체계를 갖고 있다. 생물 시간에 배운 A,G,T,C도 그중 하나다. 아데닌, 구아닌, 티민, 시토신. 그것들은 둘씩 짝을 이루게 되어 있는데 하나라도 잘못 들어가면 짝꿍이 '어, 얘 내 짝 아닌데?'하고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RNA는 단일가닥(dna의 2중 나선이 아님)으로 되어 있어 오류를 검증해줄 시스템이 없기에 소위 변이가 잘 일어난다. DNA의 안정성은 RNA의 염기 중 우라실에 다른 분자구조가 더 붙어 티민이 되어 안전장치를 해준 데다가 이중가닥 구조이기에 생긴다.
그래서 변이 된 바이러스끼리는 서로 아이고 처음 뵙겠습니다 할 만큼 염기 배열이 다를 수 있다. 이를 변이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일어난다고 표현하고, 백신 효용성도 낮아진다. 다행히 이번 코로나는 변이가 없다고 한다. 코로나는 빠르게 퍼지는 대신 낮은 치사율로 숙주의 생존을 보장하며 더 오래 살아남아 더욱 많이 퍼져 번식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이른바 길고 가늘게 산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치사율 높은 전략은 바보짓이다. 숙주가 없어지면 자기도 죽는다. 아무튼 변이가 없다 하니 백신 개발에도 호재다.

바이러스는 결국 정보만 들고 있고, 맛이 간 프로그래밍 명령어-이를테면 출력 명령어인 'printf()'-처럼 '나! 나! 나'하고 나만 찍어대는 집착적인(?) 존재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것도 남의 공장을 훔쳐 쓰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성의 원초적인 모습이랄까. 주변을 다 써먹어버리고 나를 위해서만 살려두는 전법. 의인화하자면 그게 바이러스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나르시시스트다.

바이러스의 생존 방식에 상응하는 정신을 '원초적인 이기성'이라고 표현하면 과할까? 오로지 내 생존과 욕구를 위해 움직이되, 타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우리가 가진 일면이기도 하다.


바이러스가 가진 '정보'와, 여기에 감응하는 상태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지학에서는 질병과 유기체의 상응 관계를 중요시 여긴다. 현대의학이 간과하며 스트레스성, 면역 등으로 퉁치는 부분이다. 앞으로는 연관성이 더 '과학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지금 일부 사람들이 추종하는 것만큼 신비롭거나 과하게 에너지나 기운으로 퉁치고 삼천포로 빠지지 않는 차원에서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면역세포의 빵가루 케모카인

우리 면역 시스템은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재빨리 경보를 울리고 백혈구들을 보내어 바이러스를 퇴치한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빵부스러기처럼, 호중구 세포는 '바이러스 여깄소!'하고 길을 알려주는 케모카인(CXCL12)을 경로에 남긴다. 전투 세포인 T 세포는 화학 빵가루인 케모카인을 따라 바이러스를 추적하고 잡아먹는다. 최전선에서 맹렬히 싸우는 T세포는 골수에서 생성되어 흉선에서 성숙한다. 마치 사관학교처럼, 흉선에서 훈련을 받는 T세포는 피아식별을 배운다. 교관(?)은 초보 T세포에게 자기 정보를 넣은 항원을 주고 공격하는지 아닌지를 본다. 공격하려고 하면 자폭시킨다. 스파르타가 아닐 수 없다. 그 과정을 거치고 살아남은 단 5%가량의 세포들이 전사로 배출된다. 내가 나를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도, 죽어야 하는 세포인데도 살짝 속임수를 쓰면 못 알아봐서 방치하게 되는 암도 결국 면역세포가 피아식별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흉선은 가슴에 있고, 그 부위의 에너지적 의미는 아나하타 차크라와 연관된 <사랑>이다. 사랑의 반대 에너지인 두려움이 질병과 공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두려움은 T 세포를 어수룩하게 만들어 제대로 학습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지 않는가. 스트레스는 면역 세포가 똑똑해지는 일을 방해한다. 어린 시절의 안정감은 건강에 큰 영향을 준다. 흉선은 어린 나이에 가장 많이 발달하고 사춘기 정도부터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흉선의 면역세포 학습 시스템은 어릴 때 체계가 잡힌다. 면역세포가 만들어지는 숫자는 나이 들수록 줄어들지만, 면역세포의 전반적인 질을 결정하는 시스템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스트레스 덜 받는 환경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강조되는 이유다. 과학적인 척하다가 에너지니 차크라니 하면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생화학을 빌려오자면 다음과 같다.

• 면역세포(T세포)를 훈련시켜 내보내는 기관은 가슴에 있는 흉선이다.
• 흉선 호르몬은 T세포의 분화와 성숙에 관여한다.
•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 등은 면역세포의 수를 줄이고 기능을 저하시킨다.
• 위기 상황에서 분비되는 부신피질 호르몬(스테로이드제는 이 성분)은 면역기능을 저하시킨다. 당장 살아남아야 하는 위기 상황에 분비되는 것이기에 극도의 긴장 상태로 만드는 호르몬이다. 면역 등은 후순위로 밀린다.


위 내용을 색다른 관점의 언어로 풀어보면


• 사랑을 의미하는 부위인 가슴과 가슴 차크라는 우리 몸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준다.
• 우리는 문자 그대로 어른이 되면서 어린 가슴(동심)을 잃는다. 가슴이 메마른다. 흉선이 쪼그라든다.
• 코티졸, 코르티코이드(부신피질 호르몬) 등은 심신의 생존 위기를 감지할 때 분비되는 것이기에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다.
• 부신은 신장 위 세모난 기관이고 신장은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다.


몸과 정신은 실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분자 차원에서 그렇다. 그걸 설명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통찰력 있는 이들이 표현해낸 것이 아래 글에 녹아 있다면 과할까?

이 차원에서 보자면, 원초적 이기심과 공명하는 바이러스가 개인에 침투했을 때 두려움과 만나서 더욱 활성화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면역력은 각자의 체질 등 신체적 건강 상태뿐 아니라 정신과도 연관된다. 그렇다고 사랑 가득한 사람은 코로나 안 걸려요 같은 무책임한 소리는 아니다. 우리는 충분히 조심해야 한다. 단, 질병을 이기는 힘은 면역력이고 그 면역력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는 것 중 우리가 다시금 쳐다봐야 할 중요한 요소가 마음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제 바이러스 시대에 들어섰다. 앞으로 이런 일이 종종 생길 것이다. 자연을 파괴한 벌로 수인간전염이 되는 각종 바이러스가 천형처럼 덮쳐올 것이다. 역경 극복이 취미인 민족인가 싶을만큼 우리나라 국민의 대처력과 의식은 훌륭하다. 다른 나라 하는 걸 보니 더 잘 알겠다. 왜 저렇게밖에 못하나 싶을 정도로 황당하다. 이 와중에도 자영업자 음식 이용하기, 마스크 안 사기 등 이타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나도 마스크 안 사고 있다. 물론 욕심껏 제 것만 쟁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바이러스와 공명하는 의식을 갖고 있는 셈이다.

위기는 언제나 선택을 부른다. 너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래? 그 답이 개인의 색과 모양을 드러낸다.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언제나 부끄럽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심하는 것과, 이타적인 일을 하나라도 하는 것(플라스틱 덜 쓰기부터), 아이의 흉선이 튼튼해지도록, 동심을 누리도록 품어주는 것 정도 같다. 소박하나 어려운 일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계속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오는 듯하다. 무엇이 정말 중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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