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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Jun 18. 2021

우리는 관심이 필요하다 - 부모교육 중

Feat. 교류분석(TA)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한계를 지적하고 싶다. 인간 뇌의 가소성을 믿는만큼이나 개인의 가능성 또한 믿고, 받아보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주는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용적인 사랑을 받는 것을 경험할 때도 마찬가지다.

TA(교류분석)라는 부모자녀 상호관계를 분석하여 그 질을 증진시키는 이론적 접근과 프로그램이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수퍼에고-에고-이드라는 추상적인 개념에서 탈피하여 '관찰 및 측정 가능'한 세 종류의 자아(부모자아-어른자아-아이자아)를 가지고 한 사람이 관계 맺을 때 사용하는 자아 상태를 분석하는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이론 및 기법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사람마다 세 가지의 자아 상태가 있고 어린시절의 경험 등에 의해 많이 사용하는 것,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 등 다양한 자아 상태의 변주가 존재한다. 두 사람 이상이 소통을 할 때 서로 다른 자아 상태로 교류를 하면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용어때문에 어려워 보일지 몰라도 내용은 단순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엄마 : 너 숙제 다 했니?

1) 단순히 물어보는 것이라면 '어른자아' 상태로 묻는 것.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조율적임.

2) 감시의 의미가 들어가서 '너 숙제는 다 하고 노는거니?'라는 뉘앙스가 된다면 '비판적 부모자아'상태로 묻는 것.

아이 : 아직요~

1) 아이의 어른 자아 상태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일 뿐. 이런 경우 같이 소통이 일어난 셈.

그런데 아이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아이 : 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1) 이 때는 아이는 엄마의 '비판적 부모자아'에 대항하는 '자유로운 아이 자아'를 사용한 것. 엄마의 감시하고 쪼는 듯한 뉘앙스를 알아차려 벗어나고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아이 자아로 대응한 셈.

서로 사용하는 자아가 달라 소통이 어그러지는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율하는 방법을 배우는게 TA 부모교육의 핵심이다. 나름 재미있고 실용적이라 좋다. 정신분석의 깊이까지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개념을 살짝 터치하여 아주 가볍지는 않고, 단순히 '이래야 한다'는 부모역할 훈련에 그치지 않고 어른도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끄는 교육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훌륭하다.

TA를 설명하느라 서론이 길었지만(이게 서론이었어!?), 여기 나오는 개념 중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스트로크다. 스트로크는 '쓰다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모든 종류의 피드백이 스트로크에 들어간다. 지지, 격려, 애정표현같은 긍정적인 스트로크도 있고, 비난, 학대같은 부정적인 스트로크도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스트로크를 갈구하게 되어 있다. 스트로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면 부정적인 스트로크라도 받으려고 한다. 이는 마치 '식생활이 괜찮을 때는 좋은 음식을 찾지만, 굶주리면 상한 음식이라도 먹어서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기본적인 수준의 스트로크를 받지 못하면 부정적인 스트로크라도 받아서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받고자 한다. 부모의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는 아이가 혼나서라도 관심을 받으려고 하는 것,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며 노이즈 마케팅으로 관심을 구걸하는 연예인 등의 예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든 '내가 존재하고 있어요!'라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확인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게 인간인 셈이다.

스트로크 개념은 간단하지만 이를 알고나면 아이의 문제행동도 '애정이 필요해서 하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부모의 역할을 단순히 인내하고 좋은 것을 줘야하는 '고행적인' 역할로 정의하며 괴로워하기 보다 '스트로크를 주는 존재'로 재정의할 수도 있다. 한 인간이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토양과도 같으니 이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부모의 존재 가치를 올려주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자존감이 많이 낮은 경우에는 이 역할을 버거워할 수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나라는 존재를 가장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세상에 한 사람에게 사랑과 지지를 줄 수 있다는게 얼마나 근사하고 고귀한 일인지! 자기가 못 받아봤다면 더더욱 이 귀함을 알테고, 내가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나의 결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타인에게는 아름답고 좋은 말을 하는게 그리 어렵지 않다. 내 감정이 많이 얽히지 않기 때문에 입바른 말, 예쁜 말, 온갖 칭찬과 격려를 할 수 있다. 조심할 수도 있고 나를 포장하기도 쉽다. 그들은 내 본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 마음이 가서 붙는 정도가 크고 보다 날것의 모습으로 서로 부딪히기에 그보다 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 다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일어난다. 그러니 가족 관계, 배우자나 자녀 등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 보다 양질의 상호작용을 하도록 연습하는 일은 개인에게 큰 성장이 아닐 수 없다.

부정적인 스트로크를 받는 일에 익숙해져 있으면 긍정적 스트로크가 와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건부 스트로크임에도 긍정적이라는 이유로 좋은 줄 알고 좇을 확률도 높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받을 줄도 알고 줄 줄도 안다는 말의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쉬이 '이번 생은 글렀어'로 구제불능 엔딩을 예약할 필요는 없다. 어떤 스트로크에 열려 있을지는 내가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습관적으로 내가 받아왔던 반응과 유사한 쪽으로 기우는 패턴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못 받아봐서 당장 혹하지만 사실은 독이 되는 가짜 긍정 스트로크에 반응하고 있다 하더라도, 변화는 스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희망이 있다. 즉, 제목처럼, '받아들이는 것'의 질을 결정할 수 있다. 아들러식으로 왜곡된 신념을 수정을 하건, 정신분석 방식으로 성격의 구조를 변화시키건, 공명하는 에너지 주파수를 바꾸어나가건 방법이야 자기 취향껏 하면 된다. 하지만 본질은 모두 같다. 내가 나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내면아이 관점이나 자기사랑 등 많은 심리치료(사실 내면아이는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슬로건에 가까움)나 힐링 컨텐츠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가 나의 보호자/양육자/엄마가 되어 자기 자신을 지지할 수 있다. 말이 쉽지 이걸 어떻게 하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사람 중 하나였던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이것 또한 가능한 일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우리네 거울뉴런을 작동시키고(공감), 상상력을 발휘해서 내가 경험하는 감정이나 상황을 딸이 겪고 있다고 상상해보았다. '내 딸이 지금 이런 상태라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라고 자문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에게 지지적인 말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긍정적 스트로크를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찾은 방법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뭘 받아야 하는줄 알았는데 역설적으로 주는 법을 알 때 답이 보였다.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는 얄팍할 수 없고 깊게 얽힌다. 그 안에서 단맛 짠맛 다 봐가면서도, 때론 미워서 밀어내고 싶으면서도(부당한 괴로움을 참으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상태를 경험하면,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 듯 하다. 받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받고만 싶다는건 결국 '나는 누가 채워줘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바램과 공명하는 일이기에(요새 시크릿류 변종이 많지 않은가) 누가 퍼주고 퍼줘도 종국에는 목마를 수 밖에 없다. 주는 일은 '나는 누군가에게 줄만큼 사랑을 갖고 있다'는 의식과 공명하는 일이기에 나를 채우는 일과 연결된다. 단, 조건부인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 타인의 인정을 바라면서 뭔가를 주는 일은 '내가 인정 받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해'라는 의식과 공명하는 것이기에 헌신으로 포장한 자발적 피착취자 상태로 가기 쉽다. 계속 호구잡히기 딱 좋다. 나는 최근에 머리로만 알던 이 상태를 일상에서 느끼면서 내가 취해야할 행동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여 선택하는 길에 들어섰다. 나는 기꺼이 줄 때 다정하고 사려깊게 주고, 내 능력으로 기여할 때 정당히 받을 것을 받는다.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해서 받기도 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내가 가진 많은 에너지 중 일부를 나누어준다.

스트로크는 진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지지 표현일 때 가장 강력하다. 아이를 키우는 경우라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타인을 수용하는 범위를 질적으로 늘린다. 아이 키우면서 사람 되었다 소리 들으며 둥글어지는 것도 그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에게 돌아와 스스로를 온전히 수용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기 때문에 타인의 존재없이 나 혼자 셀프힐링을 쏟아 붓는다고 효과를 볼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조건부에 머문다면 의존성이 늘어나고 내적인 사랑을 키워내기 어렵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수용하고, 좀 더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할 때 내 시야가 넓어지고 내가 주체가 되어 사랑을 해봐야 나 자신도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하고, 자기는 엄밀히 말하면 그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타자없이 사랑은 있을 수가 없다. 이자관계에서 사랑을 배운다는 뜻이다. 아이는 양육자와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배운다. 그래서 나는 자기사랑을 배우는 길은 타인을 온전히 사랑하는 주체가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애초에 엄마(양육자)에게서 결핍된 부분은 타인에게서 채울 수가 없다. 엄마만한 존재감을 가진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교수님은 이를 다음처럼 쿨하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부모 사랑 못 받은걸 얼마나 다른데서 받으려고 난린지 알아요?"

나는 이 말을 듣고 좀 웃었더랬다. 안 그런 사람이 없긴 하지. 내가 결핍이 있으니 채우려고 움직인다. 그게 동력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과 결핍을 동시에 주어 인생의 디딤돌을 주는 존재로 인연 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나의 많은 부분을 만들었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기도 했다. 스물 남짓부터 심리학이니 자기치유니 등등의 컨텐츠를 파고 영성에 관심 가져가며 내 결핍에서 오는 공허함을 채우려고 노력했었다. 40대인 지금 자식을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채우려고 애쓸수록 빈 곳이 더 의식된다는 점이다. 사실 채워진 것도 비워진 것도 비울 것도 내릴 것도 없다. 생각이 의미를 만들고 생각이 상태를 만든다. 온전히 사랑을 경험할 때, 내가 그 주체가 될 때 비로소 채우고 비우고 할 일 없이 '흐른다'. 생명은 흘러야 산다. 나도 흐르고 싶다.

내가 받을 스트로크를 결정하기 위해서, 고이고 썩지 않게 나 자신을 흐르는 상태로 맑게 만드는게 필요하다. 상한 음식에 파리가 꼬이듯 내가 상해 있으면 그저 그런 인연이 나타나 마음을 흔들거나 에너지를 빼간다. 흐르게 하는 힘은 사랑이고 이타적인 마음이다. 내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마음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사람을 만날 때 일어나는 마음이다. 경험하지 않으면 분간조차 못할 일이기에 부딪히고 조정하고 때론 이불킥도 하고 뿌듯해하기도 하면서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성장해나간다. 언젠가 TA로 부모교육을 진행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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