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쓸모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했다

by 지온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수업 시간에도 손을 들지 않았고,

쉬는 시간에는 자리를 잘 벗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금방 자기들끼리 묶였다.

나는 그 바깥에 있었다.

그날도 종이 울리자마자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제히 움직였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 가방 지퍼를 여는 소리,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섞였다.
나는 조금 늦게 일어났다.

책상 위에 놓인 책을 천천히 가방에 넣었다.
그때였다.


“야, 같이 가자.”


고개를 들었다. 보람이었다.
입학식 날 종이를 건네주던 그 아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잠깐 멈췄다.


“어디…?”
“떡볶이 먹으러.”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나 오늘 학교에 돈 안 가져왔는데.”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돈이 없다’는 가난의 완전한 증명이었지만,

‘돈을 안 가져왔다’는 내일은 가져올 수 있다는 알량한 방어막이었다.


보람이는 대수롭지 않게 자기가 돈이 있으니 같이 먹자고 했다.
누군가 사주는 방과 후의 떡볶이는 달콤했다.
그 달콤함 뒤에 섞인 미세한 부채감을 애써 삼키며,
처음으로 친구와 수다를 떠는 ‘평범한 중학생’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떡볶이를 먹고 난 뒤, 보람이는 학원에 가기 전까지 자기 집에서 놀자고 했다.
학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아파트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넓고 환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릴 적 친구의 아파트에서 겪었던 처음의 충격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질적일 만큼 깨끗한 그 공기 앞에서 나는 여전히 우리 집의
칠흑 같은 공동 푸세식 화장실을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마침 외출 준비를 하던 보람이의 엄마는 한눈에 보아도 세련되고 우아했다.


“보람이가 집에 친구를 다 데려오고 웬일이니.
얼굴이 낯선데, 같은 학원 다니는 친구니?”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깐 멈췄다.


보람이는
“그런 건 뭐 하러 물어. 나 잠깐 놀다가 학원 갈 거야.”
라며 말을 끊고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우리 엄마 완전 짜증 나. 꼬치꼬치 묻는 거 그냥 한 귀로 흘려.”


보람이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
학원 얘기, 공부 얘기, 집이 너무 싫다는 얘기를 이어갔다.


나는 보람이 엄마가 내어준 예쁜 접시 위의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나는 한 번도 다녀보지 못한 학원을 너는 지겹다고 말하는구나.
나에게는 이 공간의 모든 것이 꿈만 같은데,
너는 이곳을 지옥이라 부르는구나.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보람이는 수시로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수화기 너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람이가 말했다.


“우리 엄마가 너 되게 마음에 들어 하셔.
내가 쪽지 시험 100점 맞은 것도 다 얘기했거든.
우리 엄마 원래 내 친구들 다 날라리 같다고 싫어하는데,
너랑은 친하게 지내래.”


보람이는 밤마다 내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그 집에 계속 갔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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