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것의 무게

시간이었고, 몸이었다

by 지온

그 넓고 예쁜 방을 지옥이라 부르던 보람이와 달리,

우리 삼남매는 비좁은 방 하나를 같이 썼다.


엄마가 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먼저 잠든 적이 없었다.

늘 깨어서 엄마를 기다렸다.


평소라면 방 한가운데에 장기판을 벌여놓고 떠들었을 텐데, 중학교 첫 중간고사를 앞둔 그날 밤은 달랐다.

언니와 오빠는 각자 제 할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엎드려 책을 보고 있었다.


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연필로 여러 번 밑줄을 그었다.

공부를 한다기보다,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보람이네 집에서 얻은 나의 유일한 자리.

‘100점짜리 아이.’


그 자리를 놓치면 나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밤이 깊어서야 끼익— 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였다.


식당 냄새가 좁은 집 안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땀에 전 티셔츠 위로 바닥을 향해 무너질 듯 굽은 어깨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엄마는 웃으며 물었다.

“밥들은 잘 챙겨 먹었어?”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내일 시험이라, 조금 더 하다 잘게.”


엄마는 잠깐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딸 고생 많네. 라면 끓여 줄까?”


언니와 오빠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도 먹을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양은 냄비에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가스 불이 붙는 소리.

끓어오르는 물소리, 라면을 반으로 쪼개는 소리.

마지막에 계란 두 개가 톡 깨졌다.


그 소리가 그날 밤을 채웠다.


둥근 교자상 위에 냄비와 신김치가 놓였다.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다 됐다. 어서 먹자.”


우리는 둘러앉았다.


젓가락을 들고 막 면을 집어 올리려던 순간,

엄마의 손이 냄비 쪽으로 향했다.


그때 처음 보였다.

손목 안쪽에 붙어 있는 두툼한 거즈.


“엄마, 손 다쳤어?”

“별거 아니야. 점심에 좀 바빠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젓가락을 쥔 손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면을 집는 속도도 평소보다 느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뜨거운 불 앞에서 하루 종일 서 있던 손.

그 손으로 지금 또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라면 국물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뜨거웠다.


그런데 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집에서 내가 먹고 있는 것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라면이 아니라 시간이었고,

밥이 아니라 몸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면을 먹었다.


라면을 다 먹고 난 뒤에도 엄마는 쉬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움직였다.


씻고 나온 엄마에게 새 거즈를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손을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거즈 속에 가려진 상처는 끝내 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도 엄마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손목에 붙어 있던 거즈는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조금씩 더러워지고, 조금씩 얇아지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 자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았다.


새벽까지 책을 보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아침.


부엌에서는 벌써 압력솥의 추가 돌아가고 있었다.

추쿠추쿠.


김치 콩나물국 냄새가 차가운 공기를 밀어냈다.


나는 밥을 말아 먹고 집을 나섰다.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잠깐, 손이 멈췄다.


보람이네 집이 떠올랐다.

예쁜 접시 위의 과일,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던 웃음, 조건이 붙어 있던 말들.


그리고 우리 집.

찌그러진 냄비, 덜 식은 국, 말없이 반복되던 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가난은 우리의 지붕을 낮췄지만, 찌그러진 냄비 속의 온기마저 뜯어먹지는 못했다.


투박한 사랑이었다.


나는 그 위에 기대어 연필을 쥐었다.


그리고 끝까지, 꾹 눌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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