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소설.
그날은 새벽부터 비가 오는 날이었다. 창가의 실외기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나를 깨웠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 나는 잠에서 깨기도 전에, 눈을 뜨기도 전에 비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잠에서 깨고도 한참이나 현실감이 들지 않아 나는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날 잔뜩 마신 술 때문이거나, 아니면 늘 먹고 있는 항불안제 때문일 것이다. 혹은 둘 다. 주황색 광선이 새벽 여섯시 반을 가르키고 있었다. 언제나 잠버릇이 고약한 나는 잠에서 깨면 늘 손목 시계나 스마트폰, 안경 따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오 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서, 나는 손목 시계와 스마트폰, 안경을 모두 찾을 수 있었다. 쩍쩍 달라붙는 입천장과 눈꺼풀을 힘겹게 떼어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제 헤어졌다. 이별이 예비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은 아니지만, 전조 없는 통보에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또한 금방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얼마나 건조한 사람인지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목조목 내 결점들을 지적했고, 더이상 이런 것들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자기는 정말 좋은 사람인데, 그 뿐이야.'
술을 얼마나 들이부었을까. 나는 새벽 세 시쯤에 '잘지내'라고 겨우 답장할 수 있었고, 숫자 1이 사라지기까지 대략 30분이 걸렸던 것 같다. 나는 그 동안 그 조그맣고 노란 숫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연히도 답장은 없었고, 다만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얼 바라서? 글쎄. 그렇지만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나는 그냥 그 숫자가 지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잠에 들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어제의 전부다.
어쩌면 좋을까. 이별은 번번히 벌써 여섯 번이지만, 어떻게 해도 익숙해질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막막함이나 슬픔을 느끼고, 거세된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관계의 최종, 모든 관계가 그렇게 끝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이별은 늘 죽음을 가르키는 것 같았다. 관계가 끝난다. 하나 둘 씩 떨어져나가는 관계들을 보면서 나는 늘 죽음을 생각했다. 내가, 떨어져 나간다. 삶으로부터. 나는 견딜 수 없는 생각을 뒤로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라도 한 대 태우면 나아지겠지.
"그러니까 사랑은 이론적으로 음주 같은 거야. 다음날 숙취가 있을 걸 알면서도 우리는 술을 마시잖아?"
"그렇다면 숙취해소제는 뭐가 되니."
"글쎄, 사랑싸움?"
"사랑싸움?"
"사랑싸움을 이별을 연습하는 과정으로 생각할수도 있지 않을까?"
"나 원 참. 이런 걸 네게 묻는 내가 바보지. 너, 마지막으로 연애 해본게 언제냐?"
나는 동네 친구 한 명을 불러내, 꼼장어와 소주를 시켰다.
"어허, 경영학도가 되려면, 다 CEO여야 하나?"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우리는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태웠다. 친구는 아주 좋은 녀석이었다. 위로할 줄은 몰라도, 이야기를 들어줄줄 아는 종류의 사람이었고, 내가 애먼 소리를 해도 거기에 타박을 주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현실감 없는 지금으로부터 죄책감 없이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상대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오늘 상담은 갔어?"
"응."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던?"
"당분간 연애를 그만하라고 하시더라고."
우리는 한동안 불판에 꼼장어가 눌러붙지 않도록 연거푸 고기 조각들을 젓가락으로 뒤집었다. 살점은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판 위에서 한동안 몸을 비틀었다.
"그거 참 맞는 말이다 야."
"그치? 그런데 난 그러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고."
"정신나간 녀석. 넌 연애 좀 그만해도 돼."
"그러니까. 그만해도 되는데 말야. 왜 누군가를 만나기 시작할 땐 그런 생각을 못할까?"
"글쎄, 여기 꼼장어씨도 통발 안에 든 떡밥 냄새를 맡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 했겠지."
"개소리좀."
"야, 고기 다 타겠다. 일단 먹자."
한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연탄과 꼼장어의 향이 이미 내 배를 꽉 채우고 있었지만, 나는 꾸역꾸역 살점과 상추와 마늘을 싸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우리는 소주 네 댓병을 비우고 헤어졌고, 나는 집에 돌아와 그동안 먹고 마신 것들을 모두 토해낸 채 잠에 들었다. 물론 계산은 내가 했다.
"우리는."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무슨 주문 같은 건가요?"
"지수씨, 제 눈 봐봐요."
"갑자기?"
"빨리요."
"알겠어요. 그 다음엔?"
"그 다음에, 사랑한다고 말해봐요."
나는 한순간에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얼굴을 가득 메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디 얼굴만은 새빨개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거, 꼭 해야 해요?"
나는 짐짓 냉정한 척, 쿨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시선은 이미 그의 눈에서 달아난 뒤였다. 어떻게 그 사람을 쳐다봐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 사람, 날 좋아하는 건가?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나는 그 짧은 순간 수십 번이 넘게 그런 질문을 속으로, 스스로 하고 있었다.
"아, 진짜! 빨리요!"
"아니....."
"사랑해요."
"...."
"진짜로, 이렇게 조용히 있으시겠다?"
"사랑.... 해요."
그런 꿈을 꿨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때로 돌아가는 꿈. 우리가 화해하는 꿈. 우리가 다시 만나는 꿈. 나는 찝찝한,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가지고 늘 잠에서 깨어났다. 한 달 내내 그랬다. 여느 이별이 그렇듯, 수상한 일이었다. 이미 지긋지긋하게 겪은, 관성같은 일이지만 늘 수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만남이 음모가 아니었을까. 그날의 고백이 음모가 아니었을까. 내가 떠밀린걸까. 그 사람이 떠밀린 걸까. 분위기, 분위기? 5월의 햇살과 산들바람이나, 늦은 크리스마스의 포트 와인 같은 것들처럼 말야. 나는 한동안 베개를 꼭 껴안고 있었다. 어쩌다 막차가 끊겼을 때, 왠지 이렇게 헤어지기 싫었을 때 그 사람이 베던 베개였다. 아쉽게도, 그 베개에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새벽 세 시에 나는 용케도 세탁기를 돌리고 잤던 것이다. 베개를 껴안고, 이불을 다시 덮고, 오늘은 4월 14일, 열시 사십분.
일어날 수도, 잠들 수도 없어서. 나는 창으로 비치는 해의 실루엣이나 한참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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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연습 프로젝트 1편.
나중에 꼭 기워서 다시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