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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Apr 01. 2019

낙서였던 것들.

그림이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 문장을 쓰면서 너무 진부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몇 백 억 개가 있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문장. 최소한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그림을 그리고 낙서를 하는 경험을 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들어가보기로 했다. 그림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 내보자고. 


아마 내가 여섯살이나 다섯살, 혹은 일곱살 때였을 것이다. 배경은 어쩐지 선명하지 않고, 내가 스케치북에다가 감염된 케리건을 그리고 있던 게 기억난다. 우리 외삼촌들 덕분에 나는 다섯살 쯤부터 스타크래프트를 접했고, 그 시절 스타크래프트는 버전도 낮아서 "한스타(스타크래프트를 한국어로 번역해주는 프로그램)"가 보편적인 때였고, 오리지널과 브루드워의 시나리오도 대강 알고 있었다. 조기교육도 이런 조기교육이 없었지. 


잠깐 옆으로 새면 나는 그 다섯살, 여섯살 쯤에 외삼촌들로부터 타자도 배우고, 게임도 배우고, 컴퓨터 사용법도 배우고 했었다. 인터넷은 못 썼지만(외가집이 이사가기 전까지는 모뎀을 썼는데, 외삼촌들이 사용법을 가르쳐주진 않았다. 이사간 뒤에는 인터넷 자체를 쓰지 않았고) 스타크래프트, 에이지 오브 워2 등이 깔려 있어서 나는 늘 거기 매료되어 있었다. 이 얘기는 언제 따로 쓰기로 하고, 다시 돌아가서.


그래서 나는 다섯살 무렵에, 보통 애들은 보면 경기를 일으킬 거 같은 "감염된 케리건"을 스케치북에 그리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왜 감염된 케리건을 그렸을까? 아마 게임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타크래프트를 키면 로딩 화면의 한 가운데에 늘 감염된 케리건의 일러스트가 표시되었고, 글쎄, 지금 생각했을 때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뭔가 묘한 끌림을, 그 캐릭터로부터 느꼈던 것 같다. 취향 참....


그 그림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렇게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그냥 스케일이 컸던 건 기억난다. 흔한 스케치북에 거의 꽉 찰 정도로 사라 케리건을 그리고, 얼굴을 제외한 온 몸을 까맣게 색칠하고, 삐죽한 머리카락을 그리고, 수많은 적들로부터 공격받는 상황을 그리려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 애매하지만 커맨드 센터도 그렸던 거 같고, 마린이랑 탱크도 그렸던 것 같다. 아마 이사를 하면서 다 버렸겠지만, 또 초등학교 2학년 때 매미로 동네가 수해를 겪기도 했으니까, 이젠 찾을 수 없겠지만 만약 집에 그 시절 스케치북이 남아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 시절 그렸던 그 낙서를 보면 너무나도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서. 그 요상했던 꼬맹이의 시선이나, 세계가 궁금해지니까. 


초등학교 때는 특별히 그림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종종 덕질을 하는 데에 썼던 것 같다. 와, 그러고보니 나 초등학교 때도 글을 썼구나. 4학년 쯤인가, 이제는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소설을 세이클럽 타키 개인 홈페이지에 연재하려 들었었고, 주인공 이름이 "로믹"이었던 것은 기억난다. 그 쯤 만화로 방영했던 "마법신화 라그나로크"에 나는 푹 빠져 있었고, 거기에 영향을 받아 글을 썼던 걸로 기억된다.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을 그려보고 싶어서 캐릭터들을 구상해 그리곤 했고, 아니면 당시 엄청 좋아했던 만화인 이누야샤의 등장인물(주로 이누야샤)를 그리곤 했던 것 같다. 4학년 때 학예회에 제출할 점묘화로 이누야샤를 그렸던 것도 갑자기 생각이 난다. 연습장에 각종 낙서들을 채우고 룰을 만들어, "종이 게임"이라고 부르는 게임을 아이들과 하기도 했다. 내 인생 최초의 TRPG 경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중학교 때쯤부터 나는 그림에 취미를 붙였다.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낙서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나는 여전히 덕질에 그림을 활용했다. 밀리터리에 푹 빠져 있던 나는 각종 밀리터리와 관련된 그림을 그렸다. 총이나, 총을 든 사람, 각종 개인장비들, 헬기, 전투기 등등. 초등학교 때는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를 그리기도 했지만, 중학교 때는 특별히 그러는 일이 잘 없었던 것 같다. 늘상 총을 그려댔고, 새로이 무언가를 그려내는 것도 좋아했다. 예쁜 여자 캐릭터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런 캐릭터를 새로이 만들거나, 아니면 밀리터리와 결합시키기도 했다. 그 시절 그리던 그림들은 블로그에, 나만 보기로 잘 보관되어 있다. 정말 그림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이었다. 특별히 실력은 안 늘어도, 하루에 한 두 장씩 꼬박 꼬박 낙서를 하던 때였다. 그시절 나는 다행히 붙임성이 꽤 뛰어났고, 반의 대부분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림을 그려대도 애들이 특별히 이상하게 보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게 잘 그리지 않았음에도, 비슷비슷하게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 칭찬을 해줬던 것은 기억난다. 중학교 2학년쯤 학교 수행평가로 한국화를 그릴 때 Mi-24 Hind 헬기를 그려서 낸 적도 있었고,  밀리터리나 SF소설을 쓰려고 들면서 도시나, 새로운 헬기의 컨셉을 그리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특별히 그림에 시간을 쏟질 못 했던 것 같다. 공부 이외의 딴 것을 혐오하는 분위기에서 학업을 이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연습장이나, 종이 케이스 등은 방구석 어딘가에 처밖혔고, 이사를 몇 번 하며 그런 연습장이나 스케치북들은 종종 버려지기도 했다.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별로 그림을 그리거나 하면서 지내지는 않았다. 15년에 드로잉 북을 하나 샀는데, 지금껏 펴본 적이 딱 한 번 뿐이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렇게 잊고 지내다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문득, 최근에, 지인들의 얼굴을 그리게 되었다. 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마치고 잠깐 들린 카페에서, 다른 팀원이 먼저 내 얼굴을 그렸다. 종이 안 보고 그릴 거예요! 해체된 내 얼굴은 우스꽝스럽기도 했고, 묘하게 닮아 있기도 했다. 갑자기 나도 그림이 그리고 싶어져 펜과 종이를 빌렸다. 바로 앞에 앉은 팀원을 그렸다. 이렇게 오래간 누군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는 일. 연인이 아닌데도 오랜 시간 응시를 하고 구석구석의 비율과 축척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다른 팀원의 얼굴도 그렸다. 각각의 얼굴이 가지는 특징들이 약간 눈에 깃든 것 같았다. 그냥 볼펜에, a4 용지라 익숙하지 않은 조건이지만 꽤 만족스럽게 그림이 그려졌다. 도대체 몇 년 만에 그림에 몰두해본 것인지.


그림은 지난 시간동안 굉장히 오래간 나와 함께했던 취미인데, 요즘은 정말 그런 것들을 많이 내팽개치고 사는 것 같다. 원인이야 뭐 늘 그렇듯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수렴하기는 하지만. 아직 집 구석에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그 연습장이나 스케치북들이 문득 보고 싶어졌다. 내가 그린 그림들, 내가 그렸던 그림들. 그 시절의 나와 그 시절 내 시선, 내 세계들. 언제나 그랬듯이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은 지독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앞으로 종종 그림을 그리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또 모르니까, 20년 뒤에는 전혀 그림을 안 그리는 사람이 되어 있어서, 연습장에 낙서도 하지 않게 되더라도, 그 때의 나는 여전히 지금의 나를 궁금해하고 있을 거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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