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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리 Dec 01. 2022

"사물을 사유하다 4 - 손톱달"

손톱달

인생의 심연 속에 가라앉은 적이 있다. 사십 언저리였던가. 기억조차 희미해질 만큼 돌이키기 싫고 입 안이 써지는 그 시기, 나는 살기로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걷기였다.     


퇴근하면 가족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밥 반 공기를 입 안에 밀어 넣고는 문밖을 나섰다. 빈 가지에 어둔 바람만이 갈갈이 찢겨 나가는 밤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치열하게 살아온 만큼 억울하고 누구에게인지 모를 원망이 범람했다. 내 인생이 통째로 궤도를 이탈한 것만 같았다. 손댈 수 없이 망가져 버린 내 인생열차는 복구를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은 신의 영역이기에 어쨌거나 살아내야만 했다.      


목젖까지 차오르는 상념을 꾸역꾸역 삼켜 가며 밤거리를 걷다 보면 어둠을 빌어 두 눈에 물기가 돌곤 했다. 눈물을 떨궈내기 위해 올려다본 밤하늘에 손톱달이 한 꼬집 걸려 있었다. 마치 날 선 무언가에 베인 듯 어둠 위에 선연하게 빛나는 손톱달이 내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동병상련이었을까? 그래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안간힘’     


그토록 깊고도 광활한 어둠 속에서도 실낱같이 갸녀린 몸피로 뿜어내는 한스러운 빛이 너무도 한스러워 나는 녀석을 ‘안간힘’이라 명명했다.

밤마다 안간힘은 조금씩 살집을 불려 나갔다. 어쩌면 무언가에 찍힌 상흔같기도 했던 몸피에 조금씩 살이 붙어가다가 이내 반달이 되고 또 얼마 안 가 꽉 찬 보름달이 되었다. 매일 밤 어둠 속을 걷고 걸으며 어둠 속 안간힘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남모르게 대견해 했더랬다.      


녀석과 함께 눈물바람으로 밤거리를 걷는 사이 내 팔다리에도 조금씩 근력이 붙기 시작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붙으니 목젖까지 차올라 범람하던 설움과 분노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간힘이 두 번 정도 차올랐다 몸 풀기를 반복했을 때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내 외로움과 서러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범람하던 많은 감정들을 남편에게 두서 없이 쏟아냈다. 눈물바람 콧물바람으로 쏟아내는 내 주절거림을 남편은 이해하지는 못해도 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안간힘과 함께 인생의 심연에서 조금씩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남편과 밤산책을 나서다 녀석을 보면 ‘저기 당신 안간힘이 떠 있네’라며 농을 주고 받을 만큼 우리 부부의 관계는 좋아졌다. 심연 속 묵은 찌꺼기를 다 떠올려 뱉어내고 치열하게 부딪혀내며 우리 부부는 다시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바쁜 일상 속에 표피화 되어가던 아이들, 남편과의 관계는 내 안에 쌓였던 울화와 찌끼들을 토해내기 전까지는 그저 걷돌기만 했던 것같다. 바쁜 일상 속에 우리 가족들은 그림자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나의 안간힘이 상흔의 속살을 내 보이자 가족들도 저마다의 안간힘으로 나에게 다가왔고 우리는 그렇게 묵혔던 상처와 오해들을 이해하고 위로해 주며 보다 내밀한 관계로 다시 한 번 가족이 되었다.      


11월의 마지막밤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간만에 남편과 밤마실을 하고 싶다. 오늘 밤 안간힘이 밤하늘에 걸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차가운 북풍 속 어둠 속에 빛나고 있을 녀석의 흔적을 다시 한 번 더듬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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