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세대인 나는 여중, 여고 6년을 여자들만 다니는 학교를 나왔다. 지금 키가 중학교 1학년 때 키와 같으니 초등학교 때는 7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 안에서도 끝에서 세 네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하고 있었다.
아들 밑으로 네 살 터울 막내딸을 둔 탓인지 엄마는 매일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딸의 긴 머리를 정성껏 묶고 하얀 타이즈에 빨간 치마를 입히지 않으면 레이스 너풀거리는 원피스로 한껏 멋을 부려 학교에 보내곤 하셨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으나, 큰 키에 엄마의 패션감각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니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은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남자 아이들은 종종 짓궂은 장난을 걸어왔다.
피곤했던 국민학교 생활을 졸업하고 드디어 중, 고등학교를 여학교로 진학하면서 이제는 묻고 따질 것도 없이 교복만 입으면 되려니 기대하던 차에 날벼락같은 교복자율화가 시행되었다. 여학교라 치마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지만, 그때부터 메이커 옷이 유행하면서 단조롭던 중고등하교 등하교길은 총천연색으로 화려해졌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져서였는지 더 이상 엄마의 간섭이 싫었던 나는 한 철에 한 벌로 복장을 단일화 시켰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옷차림은 너무 촌스럽고 자존심 상한다는 편견이 왜 생겼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나는 한 학년을 등교복 두세 벌로 버텼고 친구들은 몇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옷차림만으로 나를 알아볼 수 있다며 나의 공연한 고집을 기이하게 여겼다.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서 성인이 다 된 남자 동기생, 선후배와 어울리게 되자 외모에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련된 색조화장에 반짝이는 악세서리로 꾸미고 다니는 여대생들에게는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나에게 화장과 치장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율이자 예의였을 뿐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 주지는 못했던 것같다.
그 덕분인지 단조로운 대학생활 내내 미팅 한 번을 못해 본 나는 이십대 후반까지 모태솔로를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직장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남들 해 보는 커플링도 맞춰 봤지만 여전히 악세사리에는 관심도 지식도 없었고 결혼반지도 새로 맞추기 귀찮아 지하상가에서 대충 골라 나눠끼고 있던 커플링을 다시 교환하는 것으로 가름해 버렸다. 그랬던 내가 1년 전부터 주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화장품이라면 예의상 2, 3년 화장대 위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유통기한 따라 쓰레기통으로 향하기 일쑤였고 결혼반지도 살집이 불어나면서 서랍장에 처박아 두고 살던 내가 아이라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눈두덩이에 색조화장은 물론이요 콧볼과 턱밑에 음영을 넣기도 하고, 막힌지 십 년도 넘은 귀고리 구멍을 새로 뚫어 큐빅이 화려한 귀걸이를 차기 시작했다. 불어난 손가락 굵기에 맞춰 새로 산 반지들만 해도 왼손 엄지, 검지, 약지에, 오른손 검지, 약지에 레이어드까지 포함해서 대여섯 개를 끼우고 다녔다. 직원들은 갑작스런 나의 변신에 반색을 넘어 팀장님 신변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
그럼 나는 왜 엄마로부터 탈출해 나오며 이별했던 멋부림을 오십줄에 접어들며 다시 시작했을까?
처음 나를 화장품가게로 이끈 것은 스물 남짓한 두 딸들이었다. 아이들이 한창 화장에 입문하기 시작하면서 화장품을 사 주기 위해 올리브영을 함께 드나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멀찌감치 뒤떨어져 어깨너머로 구경만 하다 아이들이 샘플용을 사용해 보는 모습이 신기해 따라서 틴트나 파운데이션 따위를 손등에 발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매대 위에 걸린 거울 속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환한 조명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중년 여자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몰려오는 낯뜨거움에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푸석푸석한 반백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맨 중년 여자의 이마는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눈 밑으로는 거무튀튀한 기미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맑고 깨끗했던 눈동자 주위 흰자위엔 핏줄이 터졌다 아물며 남긴 검푸른 멍울들이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었고 입꼬리는 불만스러운 듯 양쪽 끝이 처져있었다.
백색광이 피곤함을 더하는 것 같아 늘 보조등이나 간접 조명만 키고 살다보니 이렇게 적나라한 모습을 마주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경악스런 그날의 충격 후 내 자신이 자기 관리에 얼마나 방만하고 안일했는지 느낀 나는 세안방법부터 달리해 나갔다. 피지 청결과 모공관리를 해 주는 세안제품과 세안 후 사용할 토너패드까지 구매해 사용하면서 내친김에 색조화장까지 힘을 주었다.
신기한 것이 생기 없던 무채색에서 색조 화장과 악세사리들이 반짝거리는 총천연색으로 변한 얼굴에서 내 안에 없던 생기를 발견한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 같지만, 얼굴에 생기를 더하니 내면에 없던 생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생기가 도니 더욱 열과 성을 다해 화장과 악세사리에 치중하게 되었다.
특히, 반지란 것이 신기했다. 결혼반지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반지의 힘이란 것이 느껴졌다. 동그란 반지가 손가락 마디마디를 잡아주는 느낌을, 역도 선수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을 버티며 역기를 들어 올리는 이치와 비교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반지는 그런 힘이 있었다. 반지가 그저 멋 부리기용이었다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화장대에 빼놨겠지만, 나는 은근하게 손가락을 조여오는 반지의 존재감이 좋아 잘 때도 끼고 잔다.
오십 줄에 입문한 멋의 세계라고나 할까, 화장과 악세사리, 세련된 옷차림이란 수년 간의 병치레에 붇고 찌고를 반복하며 꾸준하게 늘어온 체중과 쇠락한 외모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빅사이즈 몰을 전전해야 하는 불어난 몸집에 어떤 옷인들 맵시가 날 리 없고, 퉁퉁하게 부은 손가락에 대여섯 개씩이나 끼고 있는 반지며 메니큐어가 돼지목에 진주목걸이로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내 생에 한 번쯤은 나 자신을 위한 멋 부림을 허용해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애매한 편견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소심함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다. 제2의 인생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나이로 오십은 좋은 나이다. 나의 치장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반지의 힘을 믿고 싶다. 요술반지도 아니오 마법의 반지도 아닌 그저 나 자신을 응원하는 반지의 힘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