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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하 Yoonha Kim Jun 24. 2020

윤하씨에게. 1

2020-04-23 (목) 13:06

안녕, 윤하 씨. 


편지 고마워요. 요즘 같은 상황엔 누구와 속 터 넣고 이야기하는 것도 정말 힘든데. 아니, 어쩌면 COVID19 이전에 사람과 사람의 긴밀한 접촉이 누군가를 해하는 게 아닐 때에도 우리는(인간은) 그다지 서로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만 그랬나, 후훗.     


5년 전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좌충우돌 잡지사 피처 에디터로 일할 때 윤하 씨를 처음 알게 됐죠. 윤하 씨 글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선했어요. 그런 거 보면 정말 신기해요, 사람이 만든 음악, 글, 영화 등 어떤 작품이나 결과물을 보면 창작자가 그대로 보이는 거. 나는 그걸 기준으로 ‘인디’와 ‘커머셜’을 구분하곤 했어요. 그래서 ‘인디’를 더 사랑했죠. 그런 사람들에 매력을 느꼈어요. 어쩜 그리 자신의 아픔, 상처, 기쁨, 사랑, 증오 등 모든 것들을 세상에 까발릴 수 있나. 나는 그러질 못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런 아티스트들을 동경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인디’ 쪽에 편향된 피처 에디터가 되었고, 한 동네에서 윤하 씨와 내가 서로 글로만 알다 만난 건 아마 내가 일하던 잡지사 외고 청탁이 아니었나 싶어요. 윤하 씨는 ‘그 바닥’에서 꾸준히 평론가로 커리어를 쌓아왔고, 무엇보다 윤하 씨의 맛깔나고 야무진 글이 좋았어요. 윤하 씨 본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음악과 뮤지션, 씬에 관한 글을 썼지만 그럼에도 나는 윤하 씨가 어떤 사람인지 보였거든요. 그러게 메일로 메시지로만 커뮤니케이션하다 마침내 홍대에서 커피 한 잔, 신사동에서 한 잔, 음악 얘기, 인디 씬 얘기, 서울 얘기, 서울에서 사는 여자 얘기 나누던 시간이 선해요. 이젠 서울에서 커피 마시고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네요. 

    

인생을 살면서 사람에겐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데, 잡지사 에디터로 일할 땐 다른 사람들 삶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듣는 데에 목말랐어요. 그런 이야기를 나라는 사람이 소화시켜 글로 옮기고, 그 글을 읽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 더 좋았죠. 그 일을 그만둘 때 즈음엔 내가 점점 없어지고 소진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더 이상 나에게 감흥이나 영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이제껏 다른 이들의 이야기와 인생과 실수와 실패에서 얻은 교훈과 성공의 지혜를 바탕으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주변에 화려한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내가 마음을 열고 의지할 만한 사람들은 사라졌어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내가 진정 의지할 수 있는 건 나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그렇게 잡지사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을 떠나 태국 꼬따오에서 다이빙하며 살아온 5년은 또 다른 인생이었어요. 한 인간으로서 또 다른 인생을 산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그리고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낯선 나라 멕시코에 있는 지금을 견뎌내지 못했을 거예요. 5년 동안 꼬따오에서 매일 같이 바닷속으로 빠져 들던 시간을 통해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닌, 온전히 나 자신으로부터 찾는 위안과 사랑과 안정과 평화를 찾았거든요. 서울에서 많이 쓴 글이기도 한데 도시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찾아다니는 건 ‘외로워서’라고 생각해요. 주변에 사람들은 많은데 다들 잘 나가고 세련되고 얼리 어댑터인 것처럼 보이죠. 내가 따라가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무언가를 늦게 캐치하거나, 놓친다고 생각하면 조급해지고 불안해지고 불행해져요. 나는 직업상 계속해서 새로운 걸 찾아내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또 이를 따라갈 것을 종용했는데, 어느 순간 내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양심에 가책이 생겼죠. 왜 우리는 새로운 걸 쫓아야 하지? 레드 제플린이 좋으면 거기에 빠져 허우적대면 되는 건데 왜 힙한 새 음악, 새 뮤지션을 모르면 음악에 일가견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지? 왜 이 사회와 문화는 그런 걸 존중하지 않는 거지? 하는 질문이 마음속에 생기기 시작했죠. 그래서 내가 만난 뮤지션들 인터뷰이 리스트엔 패티 스미스, 김창완, 최백호, 장사익이 있어요. 그들에게 배우고 싶었죠. 내가 새로운 걸 정신없이 좇다 놓친 게 무엇인지. 그렇게 배운 것들을 내 삶에 실제로 적용하기로 결심하면서 한국을 떠나게 된 거죠.     


사실, 지금도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내가 좀 더 강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 알겠어요. 5년간의 타국 생활 동안 다이빙 강사로 일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은 다 만난 것 같아요. 한국 사회 시스템에서 일하는 싱글 여성으로 살면서 부대낀 게 많아 한국 사람들은 최대한 피했어요. 영어로 모든 걸 했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아졌죠. 내가 책으로만 읽던, 영화로만 보던 다른 문화와 역사, 환경에서 다져진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내 세계관이나 사고의 폭, 시야가 더 넓어지는 걸 느껴요. 그 시간들이 결국 나를 이곳 멕시코로 이끌었고요. 5년 전의 나라면 이렇게 커다란 낯선 나라에 혼자 덩그러니 와서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을 거예요. 그만큼 나는 진취적이지 못했고, 겁도 많았고, 걱정도 사서 했고 또 게을렀으니까.      


지금은 바다 대신 수중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모든 게 셧다운 된 멕시코에서 계속 다이빙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축복이라 생각해요. 여기 올 때만 해도 케이브 코스마치고 다이빙 강사로 일을 구해 살 길을 모색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반 계획 반이 있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 다이빙 강사의 직업을 모두 앗아갔어요. 전 세계 락다운이 풀린다 해도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고 다이빙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시간이 한참 더 걸릴 거라, 다이빙 산업계에서는 내년이나 되면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있어요. 그래도 케이브 다이빙은 바다 다이빙과는 달리 굉장히 프라이빗해서 버디와 나, 단 둘이 픽업트럭에 탱크와 다이빙 장비를 모두 싣고 정글 속으로 달리고 달려 세노테에서 다이빙하기 때문에 내가 사는 도시 툴룸에 이동 제한령이 내려지지 않는 이상, 내가 집 밖을 나갈 수 있는 이상 다이빙은 가능해요. 멕시코는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국가 비상 상태 3단계에 접어들어 자동차 이동 시간에 제한이 있긴 하지만 2명이 한 차에 있고 정해진 시간 내에선 통행이 가능해요. 꼬따오에 있는 보트로 바다 다이빙하는 친구들은 모두 몇 달째 다이빙을 못하고 있어요. 다이버가 다이빙을 못하는 건 밥을 못 먹고사는 것과도 같아요. 한국에서 이미 신천지 피크 상황을 겪고 온 터라 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과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확실히 알고 온 상태였죠. 멕시코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아, 여긴 아직 시작도 안 했구나’ 할 만큼 모든 게 정상이었어요. 그래도 바이러스가 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흥미로웠어요.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난리 통이었는데,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 이곳은 모든 게 아무렇지 않다는 게. 그리고 몇 주 후, 1단계 상황 통제가 시작됐고, 2단계를 거쳐 지금 멕시코는 3단계 상황이에요. 식료품점, 약국, 병원 빼곤 모든 사업장이 문 닫았어요. 아니, 공사 업체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어요. 특히 내가 살고 있는 툴룸은 고급 휴양지로 유명한 칸쿤부터 플라야 델 카르멘에 이어진 곳이기 때문에 미국, 캐나다, 유럽 관광객이 모두 집에 격리된 상황인 지금은 유령 도시나 다름없어요. 사람이 많고 적음은 내 라이프스타일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나는 한두 명의 다이브 버디 친구들과만 만나 최대한 거리를 두고, 텅 빈 세노테로 들어가 깊은 동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혼자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다음 다이빙 전까진 나가지 않죠. 다이빙할 때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바다/보트 다이빙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말고는 최근 5년 간 꼬따오에서 보냈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다이빙하고 먹고 내 시간을 잘 보내는 게 지난 수년간 내가 해왔고 집중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나는 불평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스페인어 레슨도 받고, 멕시칸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싶었는데,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져 당황스러웠어요. 여긴 한국처럼 테스트로 승부하는 곳이 아니라서 잠재적 감염자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그런 불확실함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정부의 불투명한 정보 공개와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사람들을 미치게 하죠. 얼마 전까진 당장이라도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여기서 만에 하나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심하게 아프면 치료는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만약에’가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이미 깔끔하게 캔슬된 비행기 스케줄을 보며 마음을 비웠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옵션은 없다. 그럼 나는 여기에 갇힌 건가?’ 한번 스스로 시간을 갖고 생각해봐야 했어요. 내가 여기에 발이 묶이고, 갇혀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여기 있는 내내 불안하고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거예요. 내 마음속에 스스로 감옥을 짓기 시작하면, 진짜 지옥이 시작되는 거죠. 최근 내 인생의 매일은 다이빙하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거였어요. 지금 여기서도 내 삶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죠. ‘유지’ 자체가 온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단어가 된 지금, 나는 정말 기똥차게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불평하면 안 돼요. 지금 가진 것에,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해요. 그리고 이 이야기를 윤하 씨와,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내 삶을 돌아보면 한 번도 뭔가에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내 인생은 늘 불확실함과의 싸움이었어요.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아왔어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이 과정 자체를 나는 그저 ‘삶’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혜안이 탁월한 누군가는 인생의 답을 찾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답이 없어요. 지금껏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인정하고 나니 조바심도 자격지심도 질투심도, 마음속 갈등과 전쟁도 크게 잦아들었어요. 다이빙을 하며 사는 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요. 거대한 대양, 바닷속에서, 수천수만 년 동안 깎이고 쓸리고 쌓인 수중 동굴 속에서 다이빙하다 보면 나란 존재가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느끼거든요. 그와 동시에 그래서 나란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삶이 아름다운 축복인지 역설적으로 깨닫게 돼요. 다이빙하는 동안은 지상에서 시름하는 모든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요. 하지만 다이빙이 끝나고 수면으로 올라오는 순간, 또다시 시작이죠. 그래도 잠시 ‘스톱’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 삶은 훨씬 더 아름다워진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래요.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받고 힘들어하고 있지만, ‘인간’이라는 종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스스로 ‘스톱’할 수 없었을 거예요. 자연은, 지구는, 우주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인간’이라는 종 하나쯤 없어져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해요. 우리는 그동안 너무 거만했어요. 우리가 모든 걸 안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지금 모두 멈춘 자리에서 한번 가만히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코로나 바이러스에 잘 대처하는 한국의 뉴스는 내 어깨에 뽕을 잔뜩 불어넣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진상 규명이나 N번방 사건, 성 불평등, 소수자 불평등, 혐오, 머저리 언론 수준, 찌질한 정치판, 다양하지 못한 문화계, 시각이 넓지 못한 젊은 친구들의 편협함 등은 여전히 한국이 풀어야 할 문제들이에요. 내 삶이 그러하듯, 여러 가지 한국 사회의 문제들도 조금씩 나아지고 앞으로 나아지리라 희망해요. 그래서 나는 늘 ‘개인주의’를 주창하는 사람인데,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 하나하나가 자신의 삶에 먼저 집중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데에 집중해서 행복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된다면 그런 구성원들이 이루는 사회도 멋져질 거라고. 개인의 행복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의 실질적, 정서적 서포트가 잘 이뤄지는 게 멋진 나라라고. 그래서 아직 갈 길이 먼 한국이라고 말이죠. ‘좋은 게 좋은 거다’ ‘뭐가 그리 불편하냐’ 한국 살 때 그런 얘길 많이 듣고 살았어요. 내 양심과 신념과 가치관에 부대끼는 걸 하나하나 피곤하게 짚고 파내지 말고, 그냥 넘어가라고. 나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죠. 그러니 서울에서의 하루는 지금 이곳에서의 한 달처럼 길고 피곤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난 불평하면 안 돼요. 내가 해결할 순 없지만 여전히 부대끼고 버거운 세상의 문제들을 좀 더 강하고 두터운 마음과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아요. 언젠가 내가 다시 사회라는 정글로 돌아가게 되거나, 어른스럽게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좀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나이 먹어가는 내가 썩 마음에 들어요.      


이런, 첫 편지 답장이 너무 길었네요. 내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시간도 아주 많아 그래요. 좋은 거예요.     

코로나가 한국에선 안정세라 다행이에요. 엄마, 아빠, 친구들 걱정도 한시름 놓게 됐어요. 한국 음식이 늘 그리워요. 많이 먹어요. 한국만큼 음식 맛있는데도 없어요. 멕시코도 매운 거 좋아하고 음식 맛있는 곳이라 기대 많이 하고 왔는데, 지금은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마트에서 재료 사다 매일 팬케이크 아니면 샌드위치, 프렌치토스트만 만들어 먹고 있어요. 내 몸이 빵이 되어가는 기분이에요. 부디, 건강해요.     

답장 줘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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