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와 고용 (中), MAR-23
2023-03
백예린 씨의 오랜 팬으로서 그녀의 발매되지 않은 노래들을 종종 유튜브를 통해 찾아 듣습니다. 그중 [La La La Love Song]이라는, 일본의 옛 드라마 OST를 커버한 음악에 드라마 화면을 편집한 영상에는 아래와 같은 댓글이 적혀 있습니다.
전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기 전 주말, 언젠가 인상 깊이 읽었던 댓글을 기억해 내고는 다시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원치 않는 결과를 받더라도, 초조해하지 않고 담대하게 시간을 보내겠노라고. 비록 원하던 만큼 평정심을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결과와 독립적으로 행동하겠다고 말하는 다짐들은 소중히 맘에 새겨놓습니다. 상황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고, 초조해하지 않는 마음은 오랜 시간과 수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전 회사와의 여정이 예기치 않게 끝날 무렵, 한국으로 돌아감을 고려했습니다. 귀국은 이방인으로 사는 이들에게 평생의 숙제이고, 또 태평양을 10년 동안 가로지르는 삶 가운데 만난 난기류와 폭풍우에 제법 지쳤던 까닭입니다. 생각보다 쉽게, 더 남아보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골프와 테니스를 치는 삶에 아직은 안녕을 고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번의 고민과도 비슷하게, 연봉과 경력 그리고 자산 따위가 아닌 내가 속한 공동체와 사람들에게 갖고 있는 애정들에 이끌려 결정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의사결정 방식이 아니더라도 그다지 상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다 건너의 삶은 나를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내게 남은 것은 단 60일의 시간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취업비자를 소지한 채 실직상태에 있으며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최대 기간. 그렇게 공이 울리고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자 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한 미약한 몸부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안도감과 홀가분함을 주었던 무력감은 이제 나의 가장 큰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수많은 회사들이 정리해고를 하는 와중에 구직을 하는 회사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몇 안 되는 구직 공고에는 불과 두 시간 만에 천여 명에 가까운 지원자가 몰렸기 때문입니다. 2주간 링크드인 포스팅을 긁어모아 몇 백통이 넘는 지원서를 날렸음에도, 본격적인 이직 준비 전에 연락을 받았던 회사 하나 이외에 면접 제의가 오지 않자 이번 일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무력함이 보다 크게 울려올 때면, 원하는 만큼 담대한 표정을 짓지는 못하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낮은 곳에 있을 때면, 몸에 익은 방법들로 이를 끌어올리려 노력했습니다. 마음을 다스려주었던 노래들, 이소라의 7번째 음반과 권나무의 3번째 음반을 들었습니다. 지난날의 일기를 찬찬히 읽으며 지금보다 더 어렸던 내가 내뱉고 지켜냈던 당돌한 마음가짐을 마음에 새기려 했습니다. [나의 아저씨]를 몇 번씩 돌려보며 되내었습니다: '이것도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거야.'
익숙한 방법들로는 평안을 얻을 수 없는 날이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들을 하곤 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기도와 응원을 부탁했습니다. 그들의 조언을 따라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손을 모아 기도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신을 찾는 일이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은 지 불과 3년 만의 일입니다. 아직은 대가를 약속하지 않은 채 부탁하는 일에 서툴렀기에 나의 기도는 대부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좋은 기회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기회가 아님을 이해합니다. 이제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났습니다. "...... 만일 제게 과분한 행복이 주어진다면, 제가 필요하지 않은 만큼은 제 주변 사람들과 나누겠나이다."
연락을 주었던 단일한 회사와 마지막 인터뷰가 끝나자 나는 저번과는 다른 안도감과 홀가분함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면접을 마치고 노을이 지는 거리를 천천히 거닐다가 문득 윤종신의 [환생]이 듣고 싶어져 반복해 재생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몰려온 어둠을 피해 집으로 돌아가며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더 가벼운 마음으로 같은 노래를 듣고 싶다고.
아, 나는 폭풍우를 지나가는 조종사처럼, 구름 밑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을 여전히 그리워 하고있었습니다.
이보게, 조비노, 인생에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 힘을 만들어내면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네.
- 생텍쥐페리, 『야간 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