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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희 Jan 19. 2024

인상파의 든든한 후원자〈폴 뒤랑뤼엘〉미술상

<인상파 미술관, 찬란하게 스미다>


폴 뒤랑뤼

Paul Durand-Ruel

(1831년 10월 31일~1922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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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미술상 

파리의 미술상 뒤랑뤼엘은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무명의 인상파 화가들을 발굴해서 지원하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렸다. 그는 통찰력이 있는 미술상이었다. 당시에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인상파 미술이 않아 미술 시장을 압도하리라고 예견했다. 게다가 그는 사업수완도 좋았고, 자신의 안목이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국제적인 전시회를 여러 차례 개최할 만큼 추진력 또한 뛰어났다. 무엇보다 뒤랑뤼엘은 이타적이라고 할 만큼 인상파 화가들에게 헌신적이었다.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카유보트, 카삿, 드가, 고갱, 기요맹 그리고 모리조에 로트렉까지 그의 지원을 받은 인상파 화가의 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청년 시절 뒤랑뤼엘은 수도원에 들어갈 마음을 먹었을 정도로 현실적이거나 상업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아버지의 화랑에서 일을 시작해서 1865년에는 화랑을 물려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예술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에 뒤랑뤼엘는 화랑을 파리의 라피트 거리로 옮기고, 르 펠르티에 거리에는 지점을 개설하는 등 공격적으로 예술 사업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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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전> 낙선, 새로운 미술 시장의 탄생

1860년경에 파리는 화가들로 넘쳐났다. 젊은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을 미술시장에 내놓기 위해서 너나없이 <살롱전>에 매달렸다. 살롱전을 통해서만 그림을 판매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에 긴 시간을 공들여 출품작을 준비했다. 그러나 살롱전의 장벽이 만만치 않았기에 무수한 화가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사실 운 좋게 살롱전에 입선해서 전시장에 그림이 걸려도 빽빽하게 전시된 수많은 그림을 제치고 미술상이나 개인 애호가들의 시선을 끌기는 쉽지 않았다. 낙선한 화가들은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대안적인 시장이 절실했다.


그때쯤 다양한 취향을 가진 미술품 애호가들이 새로이 부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살롱전의 단골 주제인 신화나 역사를 미화해서 그린 고전적인 그림보다 풍경화나 풍속화에 매력을 느꼈다. 이런 미술계의 변화를 포착한 미술상들은 살롱전에서 주목받지 못한 작품들로 신흥 미술품 구매자의 기호에 맞는 다양한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면서 서서히 파리의 미술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누구보다 발 빠르게 뒤랑뤼엘이 인상파 화가들을 이끌고 최선두로 나섰다. 그렇게 1870년대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독립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숱한 우여곡절에도 꺾이지 않고 <인상파 전시회>는 기어코 8차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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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들의 은인

뒤랑뤼엘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년) 중에 런던으로 피난을 떠났다. 1970년에 그곳에서 갤러리를 열고 열 차례에 걸쳐 이어지게 된 프랑스 화가들의 전시회를 시작했다. 1871년에는 바르비종파의 풍경화가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에게서 역시 런던으로 피난을 왔던 클로드 모네를 소개받았다. 모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카미유 피사로를 뒤랑뤼엘에게 소개했다. 1872년 다섯 번째 런던 전시회에 그는 모네의 그림 두 점을 다른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 사이에 걸었다. 모네의 그림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이 전시회를 계기로 장차 미술사를 바꾸게 될 역사적인〈미술상과 인상파 화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즈음부터 뒤랑뤼엘은 〈살롱전〉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화가들을 발굴해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가난했던 모네와 피사로에게 월급을 지급해서 다소나마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도왔다. 이전에는 없었던 과감하고 혁신적인 시도였다. 모네는 뒤랑뤼엘을 만나기 전에 절망에 빠져 죽을 생각으로 센 강에 뛰어든 적이 있을 만큼 삶이 궁핍했었다.

또 한편에서 뒤랑뤼엘은 당장 판매하기 힘든 위험을 무릅쓰고 이름 없는 예술가들의 그림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1872년의 어느 날 그는 한 화가의 화실에서 들렀다가 어떤 그림 두 점과 마주친다. 그는 곧장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화실로 달려가서 거기 있던 그림 23점을 모두 사들였다. 그의 그림 수집 방식은 도박이 가까울 정도로 무모해 보이지만, 그만큼 투자에 과감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 화가는 마네였고, 그때 뒤랑뤼엘이 구입한 그림 중에 이《튈르리의 음악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 《튈르리의 음악회》 Music in the Tuileries, 1862



그러던 그에게 위기가 닥친다. 1876년에 두 번째 인상파 전시회를 자신의 화랑에서 열었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 1874년부터 이미 그의 재정 악화는 시작되었고, 그 후로 근 5년간 재정난에 허덕였다. 어쩔 수 없이 인상파 화가들에게 쏟았던 지원금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이때부터 그러잖아도 가난하던 인상화 화가들의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1877년에 열린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서도 그림 판매가 변변치 않, 전시에 참여한 화가들은 깊은 실의에 빠졌다. 그런 모습을 지쳐보던 뒤랑뤼엘은 정작 자신은 빚으로 힘겹게 사업을 이어가면서도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 모두에게 얼마간의 지원금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 시절 가난한 젊은 화가들에게 뒤랑뤼엘은 정말이지 은인 같은 존재였다.


뒤랑뤼엘은 1882년과 1883년에 처음으로 런던에서도 인상파 전시회를 열었다. 안타깝게도 두 전시회의 결과는 보잘것없었다. 그를 파산 지경에 이르게 했을 정도로 타격이 컸다. 이런 처참한 실패의 와중에도 그는 인상파 화가들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화가들을 지원하는 놀라운 행보를 이어갔다. 1883년부터는 아예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의 개인전을 연이어 열었다. 



뒤랑뤼엘과 모네.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에서,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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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전시 기획력 혹은 꼼수


홍보 전략, 꼼수

뒤랑뤼엘은 자기가 발굴한 화가들을 홍보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고안해 냈다. 당시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에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끼워서 전시하는 방식을 썼다. 다소 완성도가 밑도는 작품을 좋은 작품들 사이에 끼워서 공개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기가 이미 판매한 그림을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 수집가로부터 대여해서 실제로 판매할 작품과 함께 전시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인상파 화가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림을 홍보할 목적으로 아예 미술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카탈로그에는 미술품을 수집가들의 이름을 허구로 적어 넣어 인상파 미술이 잘 팔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현대적인 전시 형태 고안

그는 그림을 진열하는 방식을 현대적으로 바꿨다. 뒤랑뤼엘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림을 낮게 거는 방식을 최초로 고안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참으로 당연한 전시장의 모습이 그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다. 살롱전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작품을 거대한 공간에 빽빽하게 채워서 전시하고 있었다. 아주 높은 곳에 걸린 작품은 관람자의 시선이 닿지 않아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반면 그의 화랑에 방문한 관람객은 낮게 전시된 그림을 아늑한 분위기에서 친밀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림 판매 전략

뒤랑뤼엘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개방적인 화랑과는 별도로 자기 집의 방 네 개를 전시장으로 꾸며서 폐쇄적으로 운영했다. 그곳에 초대된 독특한 취향을 지닌 미술품 애호가들은 특별 대우를 받는다고 느꼈고, 곧 그의 단골이 되었다. 1900년부터는 입장권을 판매해서 일반인에게도 공개했다고 한다. 그림 판매의 통로로 경매 역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일부 화가들의 그림을 모두 사들여 독점적으로 거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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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직전 그를 살린 미국 전시회

마침내 그에게 대반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1886년에 미국 미술협회에서 그에게 뉴욕에서 전시회를 조직해달라고 요청했다. 뒤랑뤼엘은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을 잔뜩 싣고 뉴욕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미국의 인상파 화가인 메리 카삿의 도움으로 다수의 미국인 미술품 수집가를 소개받았다. 두 차례 치진 전시회는 여태껏 이루지 못했던 대성공을 거뒀다. 미국의 대중은 보수적이던 유럽 사람들과 달리 인상파 미술의 새로움에 열광했다. 1886년과 이듬해에 각각 300점가량의 그림을 뉴욕에서 전시하고 판매했다.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수의 그림을 판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뉴욕 전시회의 성공으로 그는 많은 미국인 미술품 수집가를 고객으로 확보하게 되자 거기에 힘입어 내친김에 1888년에는 뉴욕에 화랑을 연다. 그렇게 1890년대 초 무렵에 그간 미술 사업으로 진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 그는 런던과 뉴욕뿐만이 아니라 베를린과 브뤼셀에도 화랑을 차리고 인상파 그림을 세계 곳곳에 알렸다. 1892년에는 룩셈부르크에서도 인상파 전시를 개최했다. 미국에서의 이런 성공이 전해지면서 파리의 대중들도 마침내 인상파 그림에 환호하기 시작했다.



여든아홉이던 1920년에 뒤랑뤼엘는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인상파 화가들이 승리했다. 나의 광기는 지혜로움이었다. 내가 예순 살에 세상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보물들(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둘러싸인 채 빚더미에 짓눌려 눈을 감았을 것이다.”


1922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포함해서 12,000점의 그림을 전 세계에 판매했다.




ⓒ박영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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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인상파 미술관> 종이책 출간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여러분의 응원이 큰 힘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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