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은 어느 여름 저녁날, 물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바로 주인공 매기가 ‘목 없는 괴물들 중 하나’가 자신에게 버터 비스킷을 던졌다고 불평하며 샤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곧장 그 목 없는 괴물들 이야기를 남편 브릭에게 퍼붓기 시작한다. 사실 그 괴물들은 브릭의 형 ‘쿠퍼 부부’의 아이들을 의미한다. 매기는 그 아이들을 ‘작고 살찐 머리통이 작고 살찐 몸통 위에 연결 부분도 없이 얹혀 있다’고 묘사하며 ‘목 없는 괴물’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뉘앙스에도 묻어나듯 그녀는 그 아이들은 물론 구퍼 부부 자체를 탐탁지 않아 한다. 평소에는 데리고 온 적도 없던 아이 다섯 명을 아버님의 65살 생일 파티를 한다고 하자 꾸역꾸역 앉혀 놓은 것이 너무 투명한 속셈이란 것이었다. 게다가 브릭의 형수이자 구퍼의 아내 ‘메이’는 이미 여섯 재까지 임신한 몸이다. 매기는 그들이 ‘재산’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얘기한다. 아버님의 암 판정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아버님이 곧 암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아이들을 이용해 재산을 물려받으려는 투명한 속셈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 또한 엄청난 욕망을 갖고 있는 여자였기 때문에 질 수 없다며 브릭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의 대화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꽤 오래 지속된 대화 속에서 말을 하는 건 거의 매기밖에 없다. 브릭은 계속 어딘가에 홀린 얼굴로, 무관심하게 술을 들이켜며 그녀의 말을 대충 듣고 대충 답할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설득은 결코 통하지 않는다. 우리도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아버님은 당신을 총애한다며 희망이 있다고 하지만 브릭은 듣는 둥 마는 둥 관심이 없다. 한 팔에는 목발을 낀 채 술장 주위로만 왔다 갔다 하는 그는 사실 알코올중독자 신세이다. 매기는 그가 왜 알코올에 중독되었는지의 원인을 알고 있어서 종종 그 원인과 관련된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럴 때마다 브릭은 크게 분노해 말을 다 끊어 버린다. 심지어는 아내에게 목발을 집어던져 죽이려고까지 하고 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그들은 결국 좋아해서 사귀고 결혼하게 된 관계가 아닌 것 같다. 브릭은 누차 ‘같이 사는 대신 지키기로 할 조건’에 대해 얘기하고, 하루빨리 매기에게 애인이 생기길 바라고 있다. 그는 매기를 좋아하지 않고, 죽은 자신의 친구 ‘스키퍼’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동성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잊고 싶고 부정하고 싶어 그는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한창 재산과 사랑과 과거를 주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메이가 찾아와 이제 막 생일 파티가 시작된다고 알린다. 어영부영 거실에 모여 다 같이 할아버지를 위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드리지만, 할아버지의 얼굴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그는 가식적으로 느껴지는 아들 구퍼와 며느리 메이가 마음에 들지 않고, 아내인 할머니마저 허위라고 여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둘째 아들 브릭뿐이다. 하지만 브릭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조차 관심이 없을 정도로 술에 중독돼 있다.
할아버지는 분명 병원의 진단대로 자신이 암이 아니라고 믿고 있지만, 수시로 찾아오는 위경련을 버티기 힘들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아들과 며느리가 진단을 가짜로 알려준 것이어서 실제 암이 맞기 때문이다. 할머니 또한 암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말에 안도하며 동네방네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만 실상은 그 둘의 계략에 속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브릭과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브릭은 딱히 원하진 않지만, 그의 말을 다 들어주며 어쩔 땐 공감까지 해 주기도 한다. 그는 구퍼와 메이가 가식적이고, 할머니의 냄새만 맡아도 더럽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 자기는 죽지 않는다며, 여전히 여성에 대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덧붙인다. 하지만 욕망이란 요소는 자연스레 브릭에게로 넘어가 또 스키퍼와의 과거를 기억하게 만들고, 브릭은 꾹꾹 참으면서 ‘신성한 우정’이라 포장한다. 그리고 그때, 그만 욱해 버려 아버지가 곧 죽게 될 거란 말을 뱉어버리는데, 할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브릭처럼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결국 대화 단절 상태를 완화하려 했던 할아버지의 시도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그러나 딱 하나 그가 정확하게 전달한 것은, 자신의 재산을 구퍼가 아닌 브릭에게 물려주려는 의도였다. 물론 브릭은 관심 없다.
둘의 대화 이후 할아버지가 어디 가 있는 동안, 구퍼와 메이는 최소한의 인간적임을 연기하는 걸 그만두고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사실 암이 맞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한다. 그곳에는 매기도 브릭도 껴 있다.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는 할아버지처럼 브릭을 원하고 찾는다. 그들에게 구퍼와 메이는 너무나도 큰 허위의 존재였던 것이다. 구퍼는 자신은 원래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며 서류 한 장을 꺼내 어떻게든 재산을 물려받으려고 하고, 알코올중독자인 제 동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건 옳지 않다며 반박한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예기치 못한 할아버지의 등장으로 모두는 당황하고, 고양이처럼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매기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큰 거짓말을 뱉어 버린다.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이다. 할아버지는 그 소식을 철석같이 믿고 구퍼에게 내일 변호사를 만나봐야겠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브릭에게 상속권을 주겠다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가고, 메이는 매기더러 거짓말쟁이라 욕하고, 구퍼는 술을 마시고, 대망의 고양이 매기는 방으로 들어가 지금이 임신하기 가장 좋은 때라며 브릭에게 매달린다. 스탠드를 끄고 사랑한다는 말을 연신 퍼붓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브릭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웃기겠네.”라고 씁쓸히 얘기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은 이번 작품으로 처음 접하였는데, 극의 전개 과정이나 등장인물들이 전체적으로 안톤 체홉의 4대 희극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야기라기보다 그저 일상을 이야기하는 사실주의적 문체도 그렇고, 이 작품에서 나오는 여성 인물들은 모두 <벚꽃동산>의 ‘라네프스카야’와 묘하게 닮아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체홉은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작품을 집필하였다면, 테네시 윌리엄스는 당대에 대한 냉철한 비판도 사상적 제의도 아닌 감성적인 사회 고발로 다가왔다.
희곡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고양이같이 행동한다. 메이와 구퍼는 브릭 부부의 옆방에서 그들이 무얼 하는지 항상 엿듣고 작전을 짜는, 은밀하고 교활한 고양이의 모습이다. 매기는 애초에 스스로를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라고 지칭하며,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인물이다. 사실상 그녀가 여기서 제일 ‘고양이’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큰 욕망을 합리화하고 ‘허위’로써 먹잇감을 낚아채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다가 아버님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하는 행위에서 묻어나는 것 같다. 할머니도 마찬가지로 고양이이다. 그녀는 겉으로 봤을 땐 할아버지를 순수하게 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중 할아버지의 말을 빌리면, 그녀는 그가 암이 의심되었을 때 집주인 행세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놓고 막상 암이 아니란 얘길 듣고 기뻐 날뛰니 할아버지 입장에선 모순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는 걸로 보아 괜히 ‘허위’의 틀에 묶이는 게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브릭과 할아버지가 고양이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고양이란 동물이 꼭 허위와 가식과 모순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욕심’, ‘고집’으로도 표현된다면, 그들도 영락없는 고양이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직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을 놓지 않는 사람이고, 브릭도 사실을 끝까지 부정하려는 고집을 피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는 ‘매기’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 가난하게 살아서 출세하기 위해 브릭과 결혼했고, 그 가난 때문에 자신이 욕심부리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 따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는 죄다 나쁜 사람인데 나쁜 사람이 아닌 척 구는 세상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또한 여기서 나는 왜 굳이 ‘양철 지붕’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양철은 빨리 뜨거워지기도 빨리 식기도 하는 재질이다. 결국 고양이 매기의 욕망이란 것이 빨리 뜨거워지는 만큼 빨리 식는 ‘가벼운 존재’ 임을 얘기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 가벼운 것에 목메어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서 계속 버티고 있는 고양이는 결국 물질만을 추구하는 사회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작가는 이 많은 고양이들을 선과 악으로 구분 짓지도, 무엇이 옳은지 정의로운지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물고 뜯고 무시하고 욕망을 추구하다가 끝나 버린다. 이것이 작가의 단순한 역량인지 아니면 사회를 향한 의도인지는 해석이 갈리겠지만, 나는 어쩌면 해답 없이 복잡해져만 가는 사회를 겨냥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가족 간의 대화 단절을 적나라하게 풀어놓았고, 재산에 대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망, 당시에는 생소했던 성 정체성 갈등, 알코올중독이라는 정신적인 부분의 민감한 소재까지 늘어놓았다. 실제로 그가 ‘무대 디자이너를 위한 해설’에서 ‘무대는 인간의 극단적 감정을 다루고 있는 연극의 배경이 되므로, 배후에 부드러움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언급한 적도 있고 말이다.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구퍼가 서류 한 장으로 인간적인 정을 죽이려 했던 점에서 욕심이란 게 일상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단 것이었다. 또한 할아버지와 브릭의 유사성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들은 비슷한 아내를 두고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병을, 즉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고, 브릭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그에게만 잘해 주는 것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또한 브릭은 만사에 ‘무관심’하고 이 작중에서 그 누구보다 진실되고 솔직한 사람이다. 그는 술에 취해 거짓을 꾸며낼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도 할아버지가 브릭을 좋아하는 이유의 축에 낄 수 있겠다.
이 작품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한마디로 앞서 말했듯, ‘사회의 흐름’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감성적인 고발로 다가왔다. 세밀한 묘사와 배경부터가 부드럽고 서정적으로 다가온 데다가 극단적인 감정들이 오가서, 날카로운 객관성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작가가 생각한 그 당시의 문제점과 감상을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표현한 것 같은 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