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
우리는 언제부터 의자만 있으면 본능적으로 앉게 되었을까?
의자가 있어도 서 있기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뭐든 하나만 장시간 하는 것은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은 맞지만, 지금의 우리는 이동을 하는 것 외에는 일어서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앉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어느 순간, 우리가 이렇게 맨날 앉게 된 것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한 산업 구조가 만들어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8시간의 근무시간,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사실 밥 먹는 시간에도 우리는 앉아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간을 온전히 앉아있는 것으로 채운다. 5시간은 앉고, 3시간은 일어서서 일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장시간 앉다 보면, 그것도 컴퓨터만 하루 종일 보다 보면 자세는 나빠질 수밖에 없고 허리디스크 등의 척추 질환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허리와 엉덩이를 괴롭히는 삶을 살고 있다. 문제는 척추 질환만이 아니라, 내 속도 같이 아플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점심 식사 후 음식물이 소화되기까지는 최소 2시간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앉아 일을 시작하니, 속이 더부룩한 상태에서 이것이 오랫동안, 자주 지속되다 보면 소화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장염이나 위염, 이것이 더 심해지면 역류성 식도염이나 대장염으로까지 이어지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자세만이 아닌 식습관이나 다른 복합적인 요인들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역류성 식도염 몰라요? 그거 직장생활 십몇 년 하면 다 생겨요”
회사 내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
왜 당연해야 하지?
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당연하게 아파야 하는 걸까?
팀장들에게만 높이 조절 책상이 허락된다는 것은 사실 이해할 수 없다. 직급 체계가 존재한다면, 다른 부분에 있어 혜택을 주는 건 몰라도 모두가 다 동일한 허리를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에겐 스탠딩 데스크가 제공되고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데스크를 보유하지 않은 이들은 아픈 허리를 참아내며 그 책상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라고? 내가 너무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비싼 *시스 브랜드의 스탠딩 데스크를 사달라고 한 적도 없다. 애초에 좀 저렴한 책상 중에도 높이 조절 가능한 책상이 충분히 많은데 모두가 디폴트로 그 브랜드의 책상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그중 가장 비싼 스탠딩 데스크는 소수에게만 제공되는 그 구조가 내게는 어딘가 비효율적이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일주일 전, 용기를 내어 사정을 말하고 다행히 재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채리님 집에서 일하니까 좀 어때요? 몸 상태는 많이 나아졌어요?"
라고 진심으로 안부를 물어주는 직원에게
"집에 있는 삼만 원도 되지 않는 스탠딩 데스크에서 일하는 게 몇 십만 원짜리 퍼시스 책상에 하루 종일 앉아있는 것보다 백만 배 편해요"라고 대답했다.
줄 친 부분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월급을 두배로 올려줄 테니 회사에 앉아 일해달라고 해도 0.0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할 만큼 편해요,
정말로요.
굳이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애플이 회사 근무자 1만 2000여 명 전원에게 스탠딩 데스크를 지급했다는 뉴스에 우리는 놀란다.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도 대다수는 여전히 앉아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역으로 드러났다. 전 직원에게 좌식 책상을 지급하는 회사와, 스탠딩 데스크를 지급하는 회사는 당장은 후자가 더 지출이 커 보일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어떨까.
물론 장시간 일어서 있는 것 역시도 좋지 않다. 심하면 하지정맥류라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절대 서있기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뭐든 과한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과하게' 앉는 자세를 추구한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앉아있다가 집에 가는 버스에 앉았다가 집에서 앉아 밥을 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 누워 잠든다.
“양반다리"라고 불리는 그 자세는 사실 몸에는 전혀 양반이지 않다. 다리를 꼬고 앉는 습관 등이 반복되면 고관절을 비롯해 무엇보다 엉덩이에 무리가 간다. 아파보니 알겠다. 엉덩이가 사실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내 몸의 기둥인지를. 내가 아픈 이유도 사실 엉덩이가 받았던 압박과 무관하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개인적인 공간만이 아닌, 공공장소에서도 우리는 계속 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화관이나 강연장 같은 밀폐된 공간에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는 특히 더 답답하다. 공간적 한계나, 앞뒤 사람을 생각하여 모두가 앉도록 되어있는 구조를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일어나서 참여할 수 있는 자리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공원 잔디밭 버스킹이나 좌석 없는 야외 록 페스티벌 같은 분위기를 좋아한다. 원하면 바닥에 앉고, 아니면 일어나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런 자리가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
인류가 계속 추구해온 것의 정점에는 "편안함"이 있고 우리는 여기에 극도로 길들여졌다. 그 편안함이 언젠가는 불편함으로 우리를 다시 공격해올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몸이 예전처럼 회복되어도 나는 여전히 서있기를 더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연속으로 앉는 시간을 2시간을 넘기지 않다 보니 전보다는 뱃살도 줄은 것 같고 속도 훨씬 편해졌다.
과거의 나는 왜 그토록 앉기 위해 애를 썼을까.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앉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낀 과거의 나를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분명 허약해 보이는 누군가가 자리를 찾는 것을 보면서 양보를 하기까지는 왜 그리 오랜 고민이 들었을까. 더 이상 그럴 일이 없는 것은 불행 중 감사한 점이다.
어디를 가든 자리를 맡거나, 늦게 갔을 때 혹여나 앉을자리가 없을까 봐 불안해할 일이 전혀 없기에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훨씬 여유롭다. 여전히 앉을자리는 항상 준비되어 있었고, 어떻게 하면 최대한 신속하고 매끄럽게 내가 서있어야 할 이유를 설명할지에 대한 고민을 할 때가 더 많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