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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Feb 08. 2020

내 고향 뚝방길 같은 들판을 걷노라니

안 보면 후회할 미얀마의 대표 얼굴, 첫 번째 -깔로 트레킹

‘깔로 들판을 걸어보지 않고 미얀마를 말할 수 없다’

여행 중 만난 많은 여행자들이 미얀마 깔로 트레킹에 대해 얘기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여행 때는 가보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미얀마를 얘기할 때면 늘 가슴 한구석에 깔로가 깔려 있었다. 가보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깔로도 잘 모르면서 미얀마를 아는 체 하는 찝찝함이랄까 뭐 그런 기분 때문이었다. 따라서 두 번째 미얀마 여행의 1순위는 당연히 깔로트레킹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두 번째 여행 중 제일 잘한 일이 바로 깔로트레킹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기대보다 몇 배 더 황홀했던 깔로의 풍광은 지금까지도 가끔 나를 깔로 벌판으로 인도한다. 

▲깔로 트레킹: 걷는 내내 고향 생각이 따라왔다.

황홀한 깔로 가는 길

“깔로 트레킹은 꼭 하자”

“형 맘대로 해, 나는 따라가는 입장이니”

다행히 동행자는 깔로 일정을 흔쾌히 허락했다. 

우리는 깔로 트레킹 일정에 맞추어 두 번째 여행 코스를 짰다. 양곤에 도착해 간단히 하룻밤 묵고 바로 바간으로 이동하여 시작하는 여정이었다. 5년 전 여행 때와는 반대 코스로 바간에서 깔로, 깔로에서 인레, 인레에서 양곤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신비한 사원들로 가득한 바간이었지만 우리는 하루 만에 패키지여행 가이드 따라다니듯 주마간산 격으로 바간지역을 대충 훑었다. 이미 한번 방문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깔로 트레킹에 대한 기대 탓이었다.

바간에서 깔로 가는 버스는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있었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깔로를 보고 싶은 마음에 오전 버스를 예약했다. 바간에서 깔로까지는 6시간~7시간 걸린다고 했다. 

울퉁불퉁 비포장 길로 6시간을 달려가는 깔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버스를 타면 주로 자는 스타일이지만 지나가는 창 밖 풍경이 황홀해 잠으로 허비할 수는 없었다.  

우기임에도 하늘은 맑았고 영화 필름처럼 3D 입체의 몽글몽글 하얀 구름들이  몰려다니며 춤을 추었다. 달리는 버스 속도에 따라 느린 중중모리로 춤을 추다가 잘 트인 평지 길을 쌩 하니 달릴 때는 신나는 휘모리장단으로 휘몰아쳤다. 멋진 하늘을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하늘은 처음이었다. 입체감을 가진 선명한 구름 떼들이 마치 푸른 하늘 사이를 헤엄치는 것 같았다. 정말 황홀했다. 

‘에이 과장도 심하셔라. 뭐 그 하늘이 그 하늘이지’ 

어차피 뭐든 직접 보지 않으면 아무리 설명해봤자 ‘ 다락방에 숨겨 논 금송아지’ 신세 아닌가. 언젠가 좋은 날 미얀마 깔로 길을 가본다면 내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고산도시 깔로

꾸불꾸불 산길을 넘어 예정대로 오후 2시 조금 넘어 깔로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대충 던져 놓고 주인이 무료로 빌려 준 자전거를 타고 깔로 시내 탐방에 나섰다. 깔로는 인레에서 약 50km 떨어져 있고 해발 약 1,300m에 위치한 고산도시다. 고산 도시답게 공기도 맑고 쾌적했다. 사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트레킹족들이 모여드는 통에 깔끔한 숙소와 음식점도 많았고 비수기인 우기임에도 여행자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깔로 트레킹은 당일, 1박 2일, 2박 3일, 3박 4일 등 여러 선택 코스가 있다. 우리는 1박 2일 코스를 선택했다. 팀당 현지 가이드 한 명이 붙기 때문에 최소인원(출발인원 4명~5명)으로 기준요금이 책정되어 있고 인원이 모자라면 모자라는 금액만큼 추가된다. 반대로 인원이 더 늘어나면 가격은 더 싸진다. 우리가 방문한 때는 비수기여서 예약하러 갔더니 예정자가 우리 둘 뿐이었다. 2명이면 가격이 조금 부담되어 일단 다른 곳을 알아보기로 하고 돌아왔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스페인 커플 2명과 이탈리아 청년 1명이 극적으로 합류하여 가이드까지 총 6명의 팀이 구성되었다. 

▲ 깔로 풍경: 한 폭의 풍경화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고산족 마을: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드디어 깔로 벌판에 서다

1박 2일 깔로 트레킹 코스는 시내에서 픽업트럭으로 30여분을 이동 한 뒤 시작되었다. 우리가 걷는 코스는 출발지를 걷기 시작하여 하룻밤은 미얀마 고산족 민가에서 자고 인레로 걸어 들어가는 코스였다. 우리 일행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가이드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트레킹 길로 들어섰다. 함께 할 가이드는 깔로 출신의 현지인 24살의 아가씨였다. 


출발은 마치 우리 시골 동네 마을 길 같은 좁은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작은 마을 길을 지나자 탁 트인 깔로 벌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드넓은 밭들로 연결된 깔로 벌판은 붉은 황토 빛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벌판은 평야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산악지대도 아닌 고만고만한 언덕과 언덕이 시야를 꽉 채우며 무한대로 뻗어 있었다. 일행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실사 풍경화에 압도되어 순간 멍해졌다. 잠시 감상에 취했던 여행자들은 하나둘씩 풍경화 속 소품이 되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푹신한 황토 길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내 고향에서 맡았던 흙내음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뒤편에서 한참 동안 서서 고향 흙내음을 빠져 있다가 나 또한 풍경화 속으로 한 발씩 한 발씩 느그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깔로 들판은 내 고향 뚝방길 같았다. 간혹 가다 마주치는 계단식 논들은 내 고향 답박골 천수답이었고, 생김새는 조금 달랐지만 밭 주변에 한가롭게 풀을 뜯던 미얀마 물소의 순한 눈망울은 눈물 흘리며 팔려 가던 우리 집 소 누렁이가 들어 있었다. 밭 주변 나무 그늘에 옷가지와 간단한 도시락을 놓고 밭을 매는 그을린 농부를 보니 몇 년 전 돌아가신 이웃집 김씨 아저씨가 겹쳐 보였다.


걷는 길 주변에는 땅콩, 고추, 오이, 배추, 감자, 토마토, 옥수수, 생강, 호박 등 우리 고향에서 늘 보던 작물들이 심어져 있었다. 사는 곳과 먹고사는 식성이 비슷하면 사람들 성정이 비슷하다는 말이 있다. 그동안 내가 접해본 미얀마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고향 사람들처럼 정 많고 착한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우리 고향에서 보던 밭 모양새에 흙,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던 작물들을 보니 왜 미얀마 사람들을 보면 우리 고향 사람들이 떠올랐는지 알 수 있었다.

▲깔로 트레킹 길은 붉은 황톳길이었다.
▲계단식 논, 순한 물소 눈망울, 밭매는 아저씨 마치 고향길을 걷는듯했다.
▲옥수수, 오이, 호박, 토마토 등 고향에서 보던 작물들이 우리 동네에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좋은 길에서 아픈 기억이 떠오를 줄은...

고향 닮은 들판을 걷다 보니 뚝방 길을 통학하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봄이면 들꽃들이 만발하고, 초여름이면 뚝방 길 양 옆에 초록의 밀과 보리밭이 펼쳐지고, 가을이면 땅콩들이 야물딱지게 여물던 아름다운 길이었지만 내게는 질풍노도 사춘기 시절이 묻어 있는 아픈 길이었다.


‘너만 자식이 아니다’

낯선 깔로 들판을 걸으며 이 말이 떠오를 줄 몰랐다. 30년도 더 된 얘기다. 겨울 방학하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12월 초쯤으로 기억한다. 자전거 통학을 하던 하교 길 갑자기 겨울비가 내리쳤다. 맞바람과 함께 내리치는 빗줄기가 송곳처럼 손등을 찔렀다. 고등학생 나이에도 거의 중학교 1학년 키에 머물러 있었던 꼬맹이의 자전거는 맞바람으로 비틀거리며 나가질 못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된 소년은 괜한 서러움이 폭발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교 1등을 다투던 성적이었는데 고등학교 입학 후 거의 꼴찌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늘 주눅이 들어 지낼 때였다. 길게 늘어진 뚝방 길을 따라 빗물인지 눈물인지 범벅이 된 채로 차가운 비를 맞으며 터벅터벅 걸어왔다.


“왔냐” 

마침 저녁 상을 받던 아버지는 무덤덤한 충청도식 한마디를 던졌다. 나는 갑자기 무슨 용기가 났는지 무릎을 꿇으며 울먹였다.

“아버지 나 자취시켜주세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당황하던 아버지는 숟가락을 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긴장이 풀리며 제정신을 차린 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아버지 입만 힐끗거렸다.

아무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던 아버지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너만 자식이 아니다”

아버지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더니 깊은 한숨을 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애비가 못나 자식들 고생시키는 거 같아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는 니들 모두에게 고등학교까지는 공평하게 뒷바라지해 주고 싶다. 그 마음으로 뼈가 부서지도록 목수질 하며 버티는 거다. 자취시켜주고 싶은 맘이야 굴뚝같지만 누구는 더해주고 누구는 덜해주고 싶지 않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라”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 속마음이었다. 

아버지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너만 자식이 아니다”라는 말이 맴돌았다.

괜히 서럽고 무책임하게 들렸다. 반항심을 타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뭐 이리 많이 낳았대’


그 단단했던 아버지 돌아 가신 지도 벌써 30여 년이 넘었다. 뚝방 길을 통학하던 까까머리 꼬맹이는 ‘너만 자식이 아니다’ 맘에도 없던 말을 피처럼 토해냈을 그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깔로 들판에 고향 뚝방 길처럼 펼쳐진 구릉 사이로 흐릿한 아버지 음성이 들렸다.

‘너도 이제 그 길에 섰으니 애비 맘을 알겠지?’


깔로 벌판을 걸어야 미얀마를 걸은 것이다.

우리가 여행한 시기는 우기였음에도 트레킹 첫날은 운 좋게 하루 종일 날씨가 좋았다. 하지만 둘째 날은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가이드는 트레킹 일정이 있으니 무조건 출발해야 한다며 앞서 길을 나섰다. 일행들은 어쩔 줄 몰라하다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나는 오히려 비 오는 트레킹 길도 좋았다. 나는 트레킹 내내 구간구간 풍광도 좋았지만 걷으며 나와 나눈 대화시간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비 오면 비 오는대로 그 시간을 즐겼다. 걷는 내내 ‘지금 나는 내 인생을 잘 걷고 있는지, 앞으로 나는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끝없는 질문이 내면을 파고들었다.

트레킹이 끝나갈 무렵  몇 년 전 어머니 보내드리고 품었던 다짐이 떠올랐다.

‘남은 인생, 내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지’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지’

▲비 오는 트레킹 길도 좋았다.
▲깔로 벌판: 지금도 깔로 발판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멀리 인레호수가 보였다. 트레킹이 끝나가는 이정표였다. 1박 2일의 짧은 트레킹이었지만 여운이 많이 남았다. 다음에는 우기 말고 성수기에 다시 한번 이 벌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 산에 뭐 묻어 놨냐? 뭐 그리 자주 힘들게 산을 걷냐?”

매주 청계산에 오른다는 내 말에 친구 놈이 던진 말이었다. 그때는 대답을 안 하고 얼버무렸는데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의 책에 나왔던 한마디로 이유를 대신한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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