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 축제의 시작과 끝
추운 겨울이 5~6개월간 지속되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여름은 그야말로 대축제의 시작이다. 모두가 겨우내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목숨 걸고 놀아 재낄 준비를 한다. 생로랑, 생 까트린 거리에는 (그냥 놀기 위해 이름만 갖다 붙인 듯한 감이 없지 않은) 이런저런 축제가 끊이지 않고, 식당들은 음식을, 음악가들은 악기를 들고 거리로 나온다. 세계적인 명성의 국제 재즈 페스티벌, 스탠드업 코미디 축제, 푸드트럭 축제... 길어진 해까지 더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끝없는 축제들을 들락거리다 보면, 여름 끝 무렵에는 정말 육체적 피곤함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지경이 된다.
이렇게 다양한 축제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큰 축제는 시장과 농장에서 열린다. 겨울 동안 실내에서만 운영하던 장딸롱 마켓(몬트리올의 재래시장 격)은 야외 시장을 세 배로 확장해 다채로운 과일과 야채들을 쏟아 내놓고, 파머스마켓의 '제철 농산물 꾸러미'는 계속 바뀌는 제철 과일과 채소로 매주 깜짝 선물을 준비한다.
해서, (벌써 한 달도 전이지만) 여름을 마무리하며 몬트리올 근교에 있는 세네빌 유기농 농장에 소풍을 다녀왔다. 작년 제철꾸러미를 받아먹던 곳이다. 제철꾸러미는 도시의 소비자와 농민들을 직접 연결하는 공동체 지원 농업(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의 한 형태로, 소비자가 일 년 치 농산물의 가격을 농부에게 미리 내고, 매주 철에 따라 나오는 농산물 꾸러미를 수확 철 동안 받아보는 일종의 농산물 직거래이다. 배달 문화가 발달한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집에서 택배로 간편히 받아먹는 대신 여기서는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요일에 집 근처 포인트로 픽업을 가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농부의 얼굴을 매주 만나 올해 흉작인 작물이나 짖꿏은 날씨에 대한 푸념을 듣고, 함께 나온 농장 주인의 아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그런 수고가 내게는 오히려 즐거운 한 주의 행사가 되더라.
가을이 올 때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농장 소풍 행사.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커플들과 가벼운 통성명을 하고, 우리는 농부 아저씨 아담을 따라 농장을 산책했다.
우리가 당근, 케일, 그린 빈이 잘 익었는지 확인하는 방법과 작물에 따른 수확 방법에 대해서 배우는 동안, 아담의 아들 크리스티안은 당근 3대, 초록 파프리카 2개를 먹어치웠다.
농부가 말해준 제철 음식을 즐기는 법,
무절제한 섭취(binge eating)의 중요성
무뚝뚝한 농부 아담은, 이미 철이 지나 딸기는 사라지고 풀만 무성히 남은 딸기밭을 지나면서 땅이 지치지 않도록 돌려짓기를 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작물마다 필요로 하는 영양분이 다르니 한 작물의 재배 철이 지나면, 다른 종류의 영양분을 필요로 하는 작물을 이어 심거나, 아니면 휴지기를 주고 땅에 유익한 잡초를 풍성하게 자라게 두어 흙에게 다시 양분을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미 딸기 철이 지나버렸다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그렇게 구시렁거려봐야 소용이 없고, 그러니 철일 때 정신줄을 놓고 무절제하게 먹는 게(binge eating) 중요하다는' 전문가적인 조언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점심 식사 시간에는, 농장을 산책하며 수집한 채소들로 팀별 샐러드를 만들었다.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먹기, 소비하기, 살아가기
어떤 음식이 좋은 것인가, 생산하는 방식은 어떤 게 좋을까, 사람과 자연에 모두 좋은가, 개인을 넘어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 도시에서 살면서 (특히 나의 지갑 사정과, 대지에 모두ㅎㅎ)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소비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올여름에는 꼭, 집에 있는 작은 발코니에 토마토, 파, 바질 등 기본 작물이라도 직접 키워 먹어보겠다고 다짐했건만, 여행으로 자주 집을 비우다 보니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되도록, 비행기를 타고 대륙 반대편에서 날아와 슈퍼마켓에 입점(!)된 남미 채소나 흙의 흔적도 없이 깨끗이 닦여 비닐포장되어있는 미국 대형 유기농 브랜드의 채소를 사기 보다는, 파머스마켓에서 지역 농산물을 직접 구입하거나 얼굴을 아는 농부가 생산하는 소규모 농장에서 받는 농작물 꾸러미를 사 먹으려 노력한다.
나라, 지역마다 그 사정이 다르겠지만, 몬트리올의 지역 농업 시장은 그래도 아직 그 본질을 잃지 않고 순수하게 운영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중간에서 서비스 비용으로 돈을 버는 거대 자본이 끼지 않은 작은 시장이 활발하고, 농부와 소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민 자발적인 꾸러미 프로그램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제철꾸러미에 참여하면, 유기농 농산물의 가격도 거품없이 그런대로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물론, 장딸롱 마켓에 가면 관행농으로 재배된 지역 농산물, 혹은 인증받지 않은 유기농 농산물은, '파머스 마켓의 거품'이 전혀 없는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를 둘 둔 이혼남 친구 한 명은 이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자기는 빠듯한 주머니 사정 때문에 늘 슈퍼마켓 전단지 할인 상품을 중심으로 장을 본단다. 그러다 지난해에는 가계부를 적어가며 슈퍼마켓에서 할인 상품만 사먹는 것과 제철꾸러미를 받아먹는 것의 비용을 비교해보았는데, 그 둘에 차이가 없었다고. 그러니, 삶의 우선순위를 조금만 이동할 수 있다면,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되었다면, 일상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 가족에게 안전한 음식을 먹이겠다는 목표 너머를 보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들은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서 일상의 환경운동을 실천하고, 지역공동체 형성을 위해 고민하며, 때로 불편한 선택을 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한다. 물론 아직 주류 문화는 아니지만, 부러 무거운 유리병을 들고 와 불필요한 포장재 없는 곡물을 사고, 다 쓴 계란판을 챙겨 와 농부의 계란을 담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우리 동네가 나는 참 좋다.
라고 훈훈하게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창 밖으로 눈발이 흩날린다. 오늘은 고작 10월 27일인데... 오늘 오후에 받은 400불 특가 방콕 비행기표 이메일이 불현듯 떠오르는 건... 그냥 우연이겠지.
*Photo courtesy of Isabelle Gervais-Chap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