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e Kim Dec 03. 2016

벗어날 자유, 그리고 동반되는 외로움을 끌어안는 방법들

외로움에 마음이 털컥 내려앉을 때면 하는, 몇 가지 일들이 있다.

#1.

'XX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XXX,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여행 에세이집 제목으로 너무 많이 쓰여서 이제는 닳고 닳은 이야기가 되어버린 얘기들이지만, 그래도 저 경구 같은 말들은 내게는 어느 정도 유효한 것 같다. 결국, 긴 여행이란 게, 돌고 있으니까 별수 없이 뛰어야 했던 일상의 쳇바퀴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펴보게 해주니까. 뭣보다 나를 조용히 바라봐줄 시간을 주기 마련이니까. (자아 안 찾고, 나 안 만나고 돌아오는 여행이 틀렸다거나 덜 멋있거나 하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발견을 꼭 여행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좋아하는 '뭔가'가 있는 사람들은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도 그런 재부팅 잘하더라.)


이십 대 초반에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수능. 수능. 수능, 좋은 대학, 대기업이라는 전 국민 공통의 목표를 익히며 몸만 커버린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 학교, 사회, 속해 있던 모든 집단에서 벗어나 살아본 시간이었다. (난 그 목표들을 향해 그다지 열심히 달리지도 않았긴 하지만...) 그리고 그 경험은 꽤나 드라마틱했다. 뭘 하고 싶은지 몰라 어른들이 하라는 것만 억지로 하며 대충대충 살다가 내가 진짜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찐하게 생각해볼 시간도 됐고, 무엇보다 소비하고 소유하는 것을 중심으로 살던 관성에 잠시 쉼표를 찍어준 일도 아주 혁신적이었다. (사는 데 정말 필요한 건 40L 가방에 다 들어간다. 정말로)


뻔해서 쓰기 싫은 표현이지만 그때 나는 정말로 자유했고, 지금. 여기서. 더 더할 것 뺄 것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두려울 것 하나도 없이 팔을 휘저으며 씩씩하게 걷던 그 시간에도, 외로움은 찾아온다. 네가 나고 내가 너인 것 마냥, 시답지 않은 모든 일상과 풋풋한 이상을 나누던 친구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각자의 새로운 친구, 애인과 일상의 애환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들이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이력서에 넣을 칸을 인턴과 공모전으로 차근차근 채워가고 있을 때, 대기업 취업이라는 공감할 수 없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혼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내 몸을 누일 공간을 바꿔 가는 일상을 사는 일. 그건 당연히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쩌면 그게 ‘소속감’이 주는 안정과 분리되는 공포와 직면해야 했던 순간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몇 년씩 홀로 장기 여행하는 데 한 번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난 그 사람은 팔자 타고 난 거라고 생각한다. 평생 여행하면서 가볍게 흐르듯이 살 팔자, 어쩌면 스님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아, 부럽다...)


#2.

이민도 마찬가지다.


나는 정말이지 훌쩍 떠나왔다. (할 때마다 너무 늙은 척한다며 친구들에게 핀잔을 듣는 이야기이지만) 난 이 나라에 삼십이 넘어 건너왔다. 이곳에서 일상을 재부팅하는 일은 20대 때 호주로 워홀을 떠나서 술 한잔 쨍하고 부딪히면 친구가 되던 이십 대 중반의 여정과는 또 달랐다. 그러니까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시끄러운 금요일 파티에서 새로운 무리의 친구를 찾아 헤매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들 각자의 커리어를 쌓아가느라 바쁘고, 지친 주말에 사회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만날 친구 커뮤니티는 이미 공고하게 정해져 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완벽히 이해된다. 한국에서 죽네사네 하며 피곤한 회사생활을 하다 녹초가 된 주말, 난 결코 '동남아 어딘가 내가 잘 모르는 나라에서 온, 말도 잘 안 통하는 수상한 삼십 대 여성'을 만나려 애써 시간을 비우지는 않을 것이다. 내겐 내 삶의 전적을 꿰차고 있는, 척하면 턱 하고 알아듣는 친구가 이미 있는데 왜.


아무튼 그랬다. 캐나다 사는 이모/고모 등 친척 지인 찬스도 없었고, 그 흔한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새로운 언어, 불어도 시작해야 했다. 그건 누구 말마따나, 비 오는 저녁 불쑥 전화를 걸어 지금 뭐해? 하고 말을 걸, 차 한잔을 청해 대수롭지 않은 사는 얘기를 할 친구가, 최소 일 년은 없다는 이야기다.


아직도 이민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참 꽤나 외로운 시간을 통과해야 했지 싶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어느 정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민 2년 차인 지금의 사정은 훨씬 나아졌지만, 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변화한 이십 대를 함께 겪으며 'decade'를 나눈 한국의 친구들을 대신할 벗을 여기서 다시 만들 자신은... 아직도 별로 없다.


#3.

그렇게 외로움에 마음이 털컥 내려앉을 때면 하는, 몇 가지 일들이 있다.


재래시장 구경, 요리, 그리고 전신 마사지를 받는 것이다. 외로울 때 전신 마사지를 받는다니 뭔가 변태스러운 조합처럼 들리지만, 아직도 기억이 난다. 호주에서 2년을 자유분방하게 캥거루처럼 뛰어다니며 내 멋대로 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10년 전 당시 20불이 넘던 높은 시급에 에헤라 디야 좋아하며 일주일에 사나흘은 돈을 벌고, 남은 시간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며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다. 곧 한국에 가야 하니 노후대책(=급전 마련)이 필요할 것 같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어렵게 짓누르며. (정말 많이 어려웠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엔 주머니에 정말 별로 남은 게 없었다. 호주에서 인도네시아를 거쳐 중국, 몽골까지, 육로와 배편으로만 한국에 돌아오겠다는 포부는 주머니 사정으로 고이 접고, 태국으로 날아갔다. 태국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 씨엠립에 도착한 날 밤이었다. 고픈 배를 채우려 숙소 밖으로 나서는데 갑자기 정말 다리가 휘청하면서 주저앉고 싶을 만큼 막막했다. 자유분방하게 팡팡 뛰어놀면서도 마음 한켠에 차곡차곡 쌓아온 두려움. 돌아가서 뭐하지. 대체 난 어떻게 살지. 얼굴도 모르는 사장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건 정말 싫은데…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었지만, 고작 2년 해보니 돈과 삶의 안정이라는 욕망을 내려놓고 평생 가난하더라도 행복하게 작업할 용기나 사명감 같은 건, 내게는 없는 것 같았다. 한 번쯤은 이 지겨운 돈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여유 있게 선택하며 사는 삶을 갖아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회색 빌딩숲으로 돌아가 9 to 5 직장인 생활을 다시 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까 혼란, 그 자체였다. 인생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그놈의 '나만의 열정'이란 게 정말 있기는 한 건지. 경제적 안정이고 사회적 기대고 다 던져 인생을 불태울 '그걸' 찾고 싶은데, 찾아도 찾아도 그게 뭔지 모르겠는 이 멋쩍은 상황...


한국의 친구들은 자유롭게 산다며 나를 부러워했지만, 그들에게 나는 그저 한국을 벗어나 그들이 모르는 건너편 산 어딘가를 뛰어다니는 고삐 풀린 망나니? 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호주에도 한국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란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튼 그렇게 막막한 마음으로 허물어지기 직전의 회색빛 도시를 헤매이던 내가 찾아 들어간 곳은 한 맹인 마사지 가게였다. 첫 해외여행을 인도로 다녀온 메리트랄까. 놀라우리 만치 저렴한 위생관념을 가지고 있는 나임에도 한참을 망설여졌을 만큼 아주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의 마사지 가게였다. 계단을 내려가 반지하 가게에 들어가자, 바깥보다 더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페인트도 칠하지 않은 음습한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분리 벽은 커녕 제대로 된 칸막이도 없이 커튼만 둘러쳐진 그곳에, 침대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준비됐느냐, 누워라 등으로 추측되는... 말이 통할 리 없는 마사지사의 말을 대충 때려 맞춰 이해하고, 가까스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는 천천히 내 어깨에서부터 하부까지 적당한 압력을 주며 몸의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스트레스와 일종의 방치로 꼬깃꼬깃 접힌 내 몸에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내 몸 중 가장 뭉치고 긴장한 문제 부위, 왼쪽 하체 척추에 도달하여 으음- 하는 탄식 섞인 한숨을 내뱉을 때, 나는 영문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누군가 내 몸을, 내 아픈 곳을 섬세하게 감지해내어 전심으로 그곳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어쩌면 안도의 눈물이었을까. 어쨌건 그건 아주 따뜻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순간만큼은 나는 그 사람에게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한 시간의 마사지 세션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지친 육신과 영혼에 큰 위로를 받고 그곳을 나왔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가 회사 생활을 할 때도 마사지는 내 취미이자 애인이 되어 주었다. 야근 및 이해할 수 없는 직장 생활로 스트레스로 버무려진 바쁜 일주일을 보내고 나면, 대개 나는 주말근무가 있거나, 몸 어딘가가 아프거나, 아니면 부러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시내로 놀러 나갈 열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수소문을 통해 엄청난 기운을 가진 수기 마사지를 하시는 분을 찾아냈고, 그 후로 거의 매주 주말 수기 마사지를 받으러 한의원으로 갔다. 대충 알고 지내는 남자와 어색한 데이트를 하는 것보다, 어설프게 아는 지인과 마주 앉아 생각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는 차 한잔을 멀뚱히 나누는 것보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텅 빈 위로를 나누며 공허한 술잔을 부딪칠 때보다, 그때가 훨씬 따뜻하게 위로받는 기분이었다면, 그래도 역시 변태처럼 들리겠지.


#4.

요리를 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약간 통제광(control freak) 같지만 나름 구축된 나만의 시스템이 있다. 깨끗하게 닦은 도마를 카운터에 올리고, 도마 왼쪽에는 커다란 국 대접 하나를 도마 오른쪽에는 넓은 접시를 준비한다. 양파 껍질을 벗기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는 당근을 천천히 썰며 재료를 손질한다. 그리고 손질과 동시에 껍질과 꼭지 등 버리는 것은 왼쪽 대접에 모으고, 반듯하게 자른 야채들은 도마 오른쪽 접시에 가지런히 올린다. 요리할 때 익는 순서에 맞춰 넣을 수 있도록. 이렇게 요리를 하면, 요리를 마치고 뒤를 돌아봤을 때 각종 야채 껍데기 및 접시들로 가득 차 폭팔해버린 개수대를 만나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물론 요리도 더 빨리 끝난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요리를 하고 난 다음을 보면 알아. 고수가 요리한 싱크대는 요리 전과 요리 후의 모습에 변함이 없다고.(후훗)’  친구가 일하던 호주 최고 프랑스 식당의 셰프가 했다는 이 소리를 한 10년 전쯤 들었다. 그때부터 무의식적으로 고수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나? 아무래도 그때 저 말을 뼛속 깊이 새겨 넣은 것 같다.


여튼 이렇게 마인드풀(mindful)하게 요리를 하고 나면, 요동치던 외로움도 조금은 숨 죽는다. 부엌 한 켠에서 메밀가루에 따뜻한 물을 부어 만들어놓은 빵 반죽이 부풀고, 스토브 위 솥에서는 따뜻한 겨울 향신료 향기가 나는 국물이 끓고…


그래, 외로운 시간들. 그간 요리는 종종 내게, 일종의 응급처치였던 것 같다.


#5.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만든 요리가 너무너무 맛있는 시점에서는, 또 멀리 떨어져 있는 짝이나 지구 다른 편에 두고 온 사람들이 생각난다는 건 함정...




매거진의 이전글 장 담그기에 생을 오롯이 바칠 준비는 안 되었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