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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e Kim Nov 22. 2016

장 담그기에 생을 오롯이 바칠 준비는 안 되었지만

나의 애완 메주 생활기 - 3편

[나의 애완 메주 생활기]

1편: 우리 집에 새로운 생명체가 생겼다.

2편: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

3편: 장 담그기에 생을 오롯이 바칠 준비는 안 되었지만





그렇게 캐나다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최소의 노동과 수고를 투자해 집에서 장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내 생을 장담기에 오롯이 바칠 준비는 아직 안되었지만, 그래도 적당한 품을 들여 집장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글거리는 욕망으로. 한국에서 장 관련 두어 권의 책을 주문해 읽어보고 고초균이란 놈의 뒷조사도 시작했다. 메주 발효의 성공 척도인 고초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무엇이고,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그렇게 메주와 고초균에 대한 겉핡기 공부 후 내린 정리는 대략 이러하다.


메주를 잘 발효한다는 것은 일명 하얀 곰팡이, 고초균(Bacillus)과 메주곰팡이(황국균)을 일정히 키워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고초균은 적정 습도와 온도에서 생성되며, 온도와 습도가 '적정'하지 않을 경우 파란 곰팡이, 검정 곰팡이 등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곰팡이가 생긴다. 우리의 목표인 고초균은 공기 중에도 존재하지만, 볏짚을 포함한 낙엽, 마른 잡초 등에 풍부하기 때문에 메주를 이를 묶어 메달아 균을 접종시켜 주는 것이 좋다.


최소의 노동을 투자해 집 장 만들기

음식문화 운동가 고은정 선생님의 도시에서도 쉽게 장을 담글 수 있는 방법을 정리한 을 참고했다. 정제염과 하루 전 받아놓은 수돗물만 써도 충분히 맛있는 장맛이 나온다는 간증, 그리고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과정을 최소화한 장 담기 레시피를 읽다보니, 넘사벽이었던 진정한 장맛을 향한 내 안의 완벽주의, 엄숙주의를 뛰어넘을 힘이 조금 생기는 듯했다. 한정환 농부님께서 (개발하여 특허까지 내신) 4일 메주 발효법도 이에 힘을 보탰다. 전기열판을 이용해 고초균이 생기기 좋은 적정 온도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해주는 방식으로, 겨우내 긴 시간 발효 시 생길 수 있는 잡균 생성 가능성을 줄이고 짧은 시간에 메주 발효를 마치는 방법이다. (그리고 애정해 마지않는 살림 9단 주부님들의 커뮤니티 82cook 사이트에는 어려운 길을 먼저 터주신 선배 주부님들의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다) 


가마솥에서 6시간 끓이는 대신 압력솥을 이용하면 콩을 삶는데 1시간 반.

메주를 발효하고 건조하는 데 나흘.

장물을 넣고 두 달 후 가르는 것까지 반나절씩 한나절.


나쁘지 않은 장사다. 일주일 정도를 투자해서 일 년 넘게 먹을 집장을 만들 수 있다면 해볼 만한 투자라고 생각했다.(그나마 잘 만들어 놓은 메주를 구입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과정은 반나절이면 끝낼 수 있다) 제일 걱정하던 냄새 문제는 아이스박스 안에서 메주를 띄는 것으로 해결했다. 목표는 최고의 장맛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든 평균 이상의 장맛으로 정했다.

 


나의 애완 메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일상에 새로운 생명체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습관도 생겼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아이스박스에 꽁꽁 숨겨둔 메주를 열어 공기를 씌우고 온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고초균을 접종하기 위해 볏짚 대신 덮어둔 말린 허브를 제쳐내고 균이 얼마나 번식했는지 확인한다. 메주가 너무 마르지는 않았는지 습도도 체크하고, 온도 변화 과정을 일지에 적어둔다. 게으른 내 성격에 무척 귀찮은 일이지만, 내년에는 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도록 계량화하기 위해서이다. 일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똑같은 일을 한다. 


그런데, 틈이 날 때마다 들썩여보며 밥을 주고(적당한 온도와 습도) 애정하여 주는 이 일을, 놀랍게도 나는 전적으로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설레기까지 하다. 기다리는 이쁜 처자식이 있는 집으로 쭈쭈바를 덜렁덜렁 사가지고 돌아가는 가장의 기분이랄까. 사실 이런 기쁨은 시작할 때는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다. 나는 사부작사부작 움직여 보다 더 원초적인 수준에서부터 먹을거리를 직접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원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년에도 재래식 집된장과 집간장으로 무친 맛있는 나물 반찬을 먹고 싶었던 것 정도였다. 하지만 메주를 뜨고 장을 담그는 것은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이 신비로운 생명체에 대한 책임감과 그에 따른 설렘을 동반하는, 예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가슴을 덥혀주는 활동이었다. 그래, 이것도 결국 살아있는 생명체를 돌봐주는 일이니 애완동물과 크게 다를 것도 없구나 생각하며 혼자 피식 웃어본다. (물론 나는 이쁘게 키워서 잡아먹을 거지만)



일분일초까지 쪼개 쓰는 바쁜 세상을 살며,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의 슈퍼마켓 선반 위 양조간장의 편리함이야 두 번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번거로움을 기꺼이 하여 어쩌면 내 다음 세대까지 남을지 모를 근사한 씨간장을 만든다는 상상은, 꽤나 로맨틱하고 어쩌면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시간이 흐르면 늙고 퇴색되어 썩어 없어지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세월의 힘이 켜켜이 쌓여 점점 더 그 풍미가 더 깊어지는 마더 (mother) 소스가 내 찬장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을 뜨자마자 눈곱도 떼지 않고 메주를 넣어둔 작은 방으로 간다. 어젯밤 너무 덥진 않았는지 습도는 적당했는지 아이스박스를 열고 온도계를 체크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볏짚을 제치자 새 식구가 보인다.



드디어 태어났다. 하얀 고초균! 반갑다, 올 한 해 장 농사를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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