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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e Kim Nov 21. 2016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

나의 애완 메주 생활기 - 2편

[나의 애완 메주 생활기]

1편: 우리 집에 새로운 생명체가 생겼다.

2편: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

3편: 장 담그기에 생을 오롯이 바칠 준비는 안 되었지만




옛말 중 틀린 게 없다더니 정말 그랬다(?). 메주를 띄우고 음력 정월 좋은 날을 잡아 장을 담가 두어 달의 발효를 걸쳐 간장과 된장을 가르기까지. 거진 반년은 걸리는 일 년 농사를 지었는데 행여나 그 장에서 구더기가 나올까 봐, 정말로 두려웠다.


두려움을 떨치고자 재작년 한국에 갔을 때 농업기술원에서 주최한 전통음식 기술 전수 수업을 들었다. 옛날 강남 언저리가 산 양 옆으로 쭉 뻗은 논밭뿐이었을 때부터 콩 농사를 지으며 장을 담가오신 '명인' 할머니가 가문의 비법을 펼쳐내 놓으셨다.


평생 당신 손에 익은 페트병이나 한 줌 단위로 ('적당히 짜게' 하지만 '너무 짜서는 안 되는' 식의) 조리법을 설명하시는 할머니 옆에서, 리터나 그램 단위로 정리한 조리법으로 통역해주시던 며느님이 기억에 남는다. 장을 만들다가 가끔 난관에 봉착해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된장이 너무 짤 때는 콩 한 말에 콩을 한 됫박 정도 불려서 끓이면~' 하고 설명을 시작하시면, 그날 통화는 길어지는 거다. 한 말이 서울 기준 8kg인지 시골 기준 7kg인지, 됫박은 얼마나 큰 됫박인지... 옛날 사람식 계량법에 전혀 감이 없는 나 덕분에 엄마는 매번 스무고개를 해야 한다. 대충 어림짐작으로 집어넣어도 적당히 다 맛있어지는 고수가 되는 날이 나에게도 언젠가 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할머니의 우주는 전적으로 장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이렇게 콩이 뭉개지지 안쿠 두쪽으로 갈라져서 튕겨나가면 아직 안 익은겨." 
"된장은 딱 이 정도 질척거리는 게 적당한겨. 된장이 벌써 너무 되면은, 나중에 볕에 다 졸아서 짜기만 하고 먹을 게 없어."

   

가마솥에서 꺼낸 콩알이 손가락 사이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보며 아주머니들과 깔깔 웃던 기억, 절구에 쿵쿵 찧어 찍어 먹던 갓 삶은 따뜻한 콩의 고소한 맛, 적당한 되기라는 할머님의 설명과 함께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흐르던 된장의 농도... 아마 그날 내가 배워온 것은 조리법이라기보다는 장을 담그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수업을 듣고 그래, 이 정도쯤 나도 만들어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어왔다. 고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되려 반대였다. 수업을 듣고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직접 담근 장을 먹는 것에 요구되는 초현실적인 수준의 헌신이었다. 메주 발효해 정월 볕 좋은 날을 잡아 장을 담고, 장을 가르는 것은 그 시작일 뿐이다. 할머니는 날이 좋을 때는 뚜껑을 열어 볕을 쐬우고 비가 오면 마른행주로 닦으며 장을 돌보는 일을 일 년 내내 하시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이만큼 정성을 들여 장독을 돌보면, 장에 하얀 꽃이나 골마지가 필 염려가 없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우주는 전적으로 장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가족을 위한 최고의 장맛을 위해서.


나에게 그것은 가끔 친정엄마나 베이비시터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전적으로 내게만 맡겨진 육아 같은 느낌이었다. 장을 직접 만들어 먹거리 독립을 꾀해보던 나의 알량한 포부가 이불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손바닥만 한 시판 된장 한통도 일 년 동안 다 못 비우는, 그야말로 혼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일 년을 꼬박 헌신하는 수고를 들여 장을 담가먹자는 요구는 과연 현실적인 걸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이런 엄숙함을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지 싶다. 평생에 걸쳐 하도 마늘과 고춧가루를 찧고 빻는 덕에 엄지 손가락 지문이 닳아 없어질 때 즈음 터득했다는 종갓집 맏며느리의 김치 맛. 10년간 간수를 뺀 천일염과 뒷산에서 이고 지고 나른 맑은 물을 쓰는 명인의 장 비법. 이렇게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간 음식이 최고라는 풍토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을 주방 밖으로 내모는 데 한 몫하는 듯하다. 요리는 고수들의 몫이고 우리는 소비만 하는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다. 평생을 오로지 바쳐 성현의 경지에 도달한 장인의 음식이나 별이 몇개나 있다는 식당의 쉐프가 내놓은 기승전결이 딱 맞아떨어지는 코스 요리를 만날 때, 나도 탄복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수저를 든다. 하지만 요리라는 행위를 장인 혹은 셰프의 신성한 영역으로 밀어놓아 보통 사람들을 주방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냥 적당하게, 내가 직접 해도 안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한국에 살고 있었다면 생협 같은 협동조합, 혹은 믿을 만한 소규모 농가에서 발효한 메주를 구해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인 인구가 고작 5천 명도 안 되는 몬트리올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소수 민족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터, 그런 감사한 호사를 누리기는 진작에 글렀다.


'장 담그기'란 것이 과연 일과 여행으로 집을 자주 비우는 내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이런저런 의구심을 안고 캐나다로 돌아왔다. 그 후 벌써 일 년 반이 흘렀고, 그때 만들어온 된장과 고추장은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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