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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e Kim May 15. 2017

몬트리올 귀촌 생활, 장 가르기


참 징하게 긴 겨울이다. 올해는 5월이 들어서고도 벌써 두 번이나 눈이 내렸다. 이럴 때면 일 년 12달의 대략 6개월이 추운 겨울인 설국의 나라, 캐나다 몬트리올에 산다는 것을 실감한다.


몬트리올은 캐나다에서 토론토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이지만,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게 여긴 그냥 적당한 흥겨움이 서린 시골 마을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 '귀여운 시골 마을'의 지하철은 고작 3개의 호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호선 당 평균 역수는 20개가 채 안 된다. 주말이면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중심 거리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30분이면 걸을 수 있는 수준. 늘 새로운 트렌드와 다양한 놀거리로 흥성거리는 화끈한 나라에서 온 한국 사람들은 때로 이런 몬트리올을 답답해하기도 하지만, 난 이 작은 도시의 사적이고 친밀한 느낌을 좋아한다. 1년만 살아도 대충 도시의 전체 윤곽이 감 잡이는 이런 아기자기함이 나는 좋다.


도시는 느리게 변하고, 동네 한 구석에 새로 생기는 가게나 식당들도 몇 달에 걸친 공사 끝에 아주 천천히 동네에 고개를 내밀어서서는, 웬만하면 몇 달 만에 문을 닫거나 새로 바뀐 유행을 반영한 가게가 들어서는 일은 잘 없다. 저녁 8시만 되면 문을 닫는 슈퍼들, 식당들도 밤 10-11시가 되면 슬슬 문을 닫을 채비를 한다.


아마도 나는 이런 썰렁한 동네에서 서울에서보다 조금은 느린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메주를 기르며 긴 겨울을 보내고, 우표를 부친 손편지로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고, 봄 언저리에는 집 안 작은 발코니에 씨앗을 심고 돌보는 그런 일상. 어쩌면 캐나다 혹은 몬트리올에서 살아서 이런 삶을 산다기보다는, 서울을 떠나며 그런 삶을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일하는 삶'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이란 개인의 삶에 엄청난 헌신을 요구했다. 전쟁 같은 일주일을 마치고 주말을 맞은 나에겐 꼭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끄적이고, 씨앗을 심어 텃밭을 가꾸는 등의 '느린 활동'들을 할 에너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 일이 쌀을 사기 위해 하는 생계용 일이든, 꿈과 열정으로 이루고 싶은 고귀한 그 무엇이든 간에, 그런 전적으로 '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내게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선 순간, 난 담담하지만 아주 확고하게 한국을 떠나는 결정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이곳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았다. 그리고 지난겨울 나는 메주 기르기라는 새로운 취미활동을 시작했다. 여섯일곱 시간 콩을 푹 삶아 메주 덩이를 만들고, 전기장판으로 온도를 맞춰주며 곰팡이들을 키우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메주를 띄우고 있는 방으로 달려가는 내 모습에, 애완동물을 키우는 기분이란 이런 걸까? 하며 피식 웃기도 했다.


겨우내 느리게 핀 꽃, 장 가르기

메주를 기르고 장을 담는 지난 반년 동안의 기다림은 엄청난 즐거움이었다. 사실 메주를 띄워 장을 담그고 된장과 간장을 얻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세 가지 재료가 필요할 뿐이다. 콩, 물, 소금. 나머지는 공기와 시간이 알아서 일해 준다. 콩을 삶아 찧져 메주 모양을 만들어놓고 온도를 적당히 맞춰주면 겨우내 메주는 쿰쿰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간다.


새해가 밝고 동이 나가는 집 된장을 보며 애태우던 나는 조금 이른 1월 초, 겨우내 말린 메주를 소금물에 담갔다. 발효된 메주를 19도 염도를 맞춘 소금물에 넣고 기다린 지 또 석 달, 기나긴 기다림 끝에 장을 가르는 일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소금물에 담겨있던 메주를 꺼내 붉은 빛 뽀얀 국물을 걸러내면 간장이 되고, 으깬 메주는 된장이 된다. 이 상태에서 바로 먹을 수도 있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된장과 간장 모두 다시 독으로 돌아가 3차 발효를 계속한다. 날이 조금씩 더워지는 6월 즈음 되면 좀 더 구수해진 된장과 간장 맛을 볼 수 있을 거다.



피지 않는 난초를 오랜 정성으로 가꾸다가 몇 년만에 꽃과 향기를 얻고 눈물을 흘렸다는 감수성 넘치는 옛 시인의 이야기를 갖다 붙이기엔 겸연쩍으면서도... 어쩐담? 나는 왠지 이제 그 시인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간장아, 어서 익어라. 어서 걸게 여물어 나물 무침에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묵직한 존재감을 입안 가득 퍼뜨리는 씨간장이 되어주렴. 일없이 곱게만 생긴 곰팡이 꽃일랑 피우덜 말고. 오- 오직 오랜 기다림 끝에 함께 할 수 있는 너, 단순하고 느린 너는 아름답구나. (으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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