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 영화 산책
지금의 해맑을 만나기 훨씬 전.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날이면 작고 좁은 자취방 침대에 늘어져 영화만 주구장창 보던 시절이 있었다. 봐도 봐도 보고 싶은 영화가 넘쳐나던 시절. ‘Eternal Sunshine’은 세 번쯤, ‘500일의 썸머’는 두 번쯤 돌려보던 그때. 보고 싶은 영화 위시 목록을 뒤적거리다 고른 영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이라는 영화였다. 연애 안식년이 몇 년째 계속되던 날이어서 나의 메마른 연애감정에 수분 공급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그래, 오늘 연애 수분 공급은 바로 이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고, 화면엔 영화의 원제목이 적힌 자막이 크게 떠올랐다.
[Sidewalls]
뭐지, 이 영화 제목의 갭 차이는...?!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역시 결국은 제목 때문에 Play 버튼을 누르긴 했지만, 영화는 줄곧 [Sidewalls]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취업난과 실업률이 사상 최고치를 찍고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꿈을 펼쳐보겠다고 도심 한복판, 몸 하나만 겨우 눕힐 수 있는 원룸에 살면서 생활비 걱정만으로도 인생이 벅차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뻗는 날들. 이런 20대에게 사랑과 청춘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 사랑은 언제 하나, 아니 사랑도 전에 사람은 언제 만나나, 외로움에 지칠 새도 없이 아침이면 또 몸을 일으켜 일을 하러 나가야만 하는 청춘들. 이런 청춘들이 원룸의 벽과 벽 사이에, 건물과 건물 사이에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벽만 부수면, 건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다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시쳇말로 '혐생'에 갇힌 청춘들은 그게 쉽지가 않다.
산타페 1105번지 4층에 사는 마틴과 건너편 건물 산타페 1183번지 8층에 사는 마리아나. 이들은 그렇게 가깝고도 먼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어느 날 밤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인해 집 밖으로 나서면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줄곧 나만의 월리를 찾아 헤매던 마리아나는 월리를 찾아내듯 마틴을 찾아낸다. 지구를 탈탈 털어도 없을 것만 같던 나만의 월리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을 줄이야. 서로를 만나고 나서야 보인다. 세상의 모든 사인들이 다 서로를 향해 가리키고 있었음을.
2011년에 처음 개봉한 이 영화는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청춘들의 공감을 얻어낼 만한 영화인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하다. 그만큼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아서. 아니, 더 나빠지지 않았다면 다행이겠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좋았던 건, 온통 회색빛뿐인 삶도 함께 공감하고 의지하고 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따뜻한 붉은빛으로 물들일 수 있지 않나, 하는 희망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혼자 자취방 침대에 누워 이 영화를 보며
'내 월리는 어디에 있는 거야' 하고 툴툴거릴 때, 나는 꿈에도 몰랐다.
5년 뒤, 신혼여행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골목을 남편이랑 걷고 있게 될 줄.
영화의 오프닝에선 '인생게임'이라는 보드게임 화면으로 시작한다. 해맑과 나도 처음 만나 '인생게임' 보드게임을 하다 친해지고, 만나고, 결혼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신혼여행을 오게 됐는데... 이럴 때면 괜히 그런 걸 믿고 싶어 진다. 모든 게 다 이렇게 될 운명 같은 걸.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한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우리는 오늘 영화 속에 나왔던 장소들을 따라 산책하기로 했다. :)
2017. 03. 28.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영화에 나왔던 장면들을 캡처해서 핸드폰에 담아두었다가 오늘 해맑과 함께 다녀왔다.
아쉽게도 남주인공 마틴이 사는 산타페 1105번지 건물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지만
내 곁엔 여주인공 마리아나가 ‘월리’처럼 찾던 짝이 있으니
어딘들.
영화 속 주인공 마리아나는 건축학도인데,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엘리베이터 공포증이 생기기 전에 카바나 빌딩을 둘러봤었다. 15대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아름다운 마천루의 31층까지 거뜬히 올라갔다. 30년대 말 세계 최대의 콘크리트 건축물이었다. 그것이 감춘 역사만큼이나 충격적인 건물이다. 코리나 카바나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부유했지만 평민 출신이었던 그녀는 귀족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안초레나 가문의 반대로 둘의 관계는 끝났다. 저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은 ‘바실리카 상테시모 새크라멘토(The Basílica Santísimo Sacaramento)’ 였는데 그 집안이 세워서 나중엔 가족묘가 된 건물이다. 안초레나 궁은 공원 반대편에 있었는데 바실리카 옆에 새 궁을 짓길 원했다. 코리나 카바나는 농장 셋을 팔아서 단 하나의 이유로 마천루를 지었다. 바실리카의 정면을 막아서 안초레나 사람들이 바실리카를 못 보게 하려고. ‘코리나 카바나’ 골목을 통해서만 바실리카를 볼 수 있었다. 나중에 딸을 낳으면 이름을 코리나라고 지을 예정이다."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중에서.
아르헨티나 초기 모더니즘 건축의 정점으로 꼽히는 카바나 빌딩. 1934년 건설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단 14개월 만에 지어졌지만, 빌딩 내 신축 아파트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공사비를 아끼지 않고 최고의 품질로 지었다고 한다. 105개의 모든 아파트에는 중앙 에어컨, 12대의 엘리베이터뿐만 아니라 고층에 있는 객실에는 강, 공원, 도시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테라스 정원이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건축물로 지정되었다.
어느덧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저녁이 슬금슬금 내려온다.
영화를 따라 산책하는 것이 처음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 영화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찾지 못해도, 길을 좀 헤매도 마냥 즐거웠다. '부에노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산책은 이렇게 끝이 났다.
낮이 지면서 세상을 모두 아름답게 물들어버리겠다는 심산으로 노란빛을 흩뿌리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얼추 한 세기 전 벌어진 지독한 사랑싸움이 박제된 공원에서
해맑도 나도 그저 해맑게 행복했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