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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작가 Sep 09. 2021

낯선 곳에서의 고요는 불안을 춤추게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길을 잃다 1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비극은 절대로 한 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백주대낮에 대문과 창문이 모두 꽁꽁 걸어 잠겨 있고, 심지어 창문은 모두 나무로 된 덧창으로 닫혀 있어 안이 보이지도 않는데 그 안에서 큰 개들이 경계와 두려움으로 컹컹 내짖는 울음소리만이 울리는 골목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다. 그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가장 치안이 위험한 곳, 라 보카의 뒷골목이었다. 이 비극의 시작이 어디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하루의 시작은 좋기만 했다.






  14일간의 신혼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늘 ‘타협’과의 전쟁이었다. 어디를 가고 어디를 포기할 것인가? 매 끼니, 어느 정도의 음식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사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의 숙소(호텔, 민박,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잘 것인가?’ 우리는 나름의 기준들과 비슷한 가치관들로 그동안 잘 타협해왔다. 런던에선 꼭 가고 싶었던 힙한 호텔에서 묵고, 바릴로체와 엘 칼라파테에서는 게스트하우스와 민박집에서 묵고, 대신 세계의 끝 우수아이아에서는 특별히 호텔에서 묵는 식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며칠 묵는 동안 적당한 호텔에서 며칠 묵고, 오늘은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이니까 아주 근사한 호텔의 펜트하우스를 예약했다. 그동안 우리가 묵었던 호텔들 중 가장 비싸고 좋은 호텔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니까 같이 근사한 야경을 보고 싶어.”



  해맑의 소박하고도 럭셔리한 꿈이었다.





  터질 것 같은 캐리어와 머리 위로 불룩 솟아오른 백팩을 메고 우리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오래되고 때 묻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하얀 건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얗게 하늘 위로 솟아오른 호텔. 호텔 입구라기엔 너무나 삼엄해 보이는 쇠창살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 앞에 서니 괜히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철문 옆에는 유리로 된 경비 부스가 있었는데 선팅이 되어 햇빛이 모조리 튕겨나가는 중이었다.


  "이거 눌러볼까?"


  우리는 철문 옆에 붙어 있는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인터폰으로 경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약자라고 하니 철커덕, 잠겨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호텔 입구까지 걸어 들어가는데 왠지 모를 긴장감과 위엄에 내딛는 걸음마다 ‘우리는 수상한 사람 아니고 정말 여행자예요!’ 하는 느낌으로 걸었다. 생각해보면 그곳에 있는 경비원들은 모두 여행객을 보호하려고 있는 사람들인데, 왜 여행객인 내가 경비원을 두려워하며 최대한 선량한 사람인 척 걸음을 걸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호텔은 말 그대로 근사했다. 1층엔 프라이빗 수영장이 있었는데 푸른 물색이 하얀 호텔과 대비되어 마치 들어가선 안 될 것 같은, 데이빗 호크니의 그림처럼 그냥 거기 그렇게 아무도 없어야만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얀 로비에서 체크인을 하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가장 높은 숫자의 버튼을 눌렀다.



호텔룸에서 내려다본 부에노스아이레스 시티뷰



  "와아아아아! 대박이다아!"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아찔한 높이였다. 이곳을 마지막 숙소로 정하길 잘했어! 이제야 신혼여행 온 것 같아! 마지막 밤이지만 오늘 밤은 정말 행복할 것 같아! 신난 감탄사가 마구 쏟아졌다.


  "오늘은 어디 갈까?"

  "아, 오늘도 계획이 없으니까 너무 좋다!"

  "음, 일단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니까... 또 아사도 먹으러 갈까?"

  "그래! 아테네오 서점도 다시 찾아보자!"

  "그래! 근데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왔는데 라 보카는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가까운 것 같은데?"

  "그래! 마지막엔 탱고 쇼를 보자!"

  "그래! 일단 나가자!"





  마침 호텔 근처에 아사도 뷔페 레스토랑이 있었다. 런치타임으로 저렴하게 아사도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사도’란, 소갈빗살 구이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아사도’란 아르헨티나 전통 방식으로 구운 소고기(혹은 돼지고기나 양고기까지) 전체를 뜻하는 것이어서, 고기 코너에 가서 셰프에게 정확히 소 갈빗살 부위를 말해야 그 부분만을 건네준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아사도’를 달라고 해서 여러 부위를 조금씩 잘라 받았었는데 이제는 정확히 소갈빗살만을 달라고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오늘의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니!


  꾸역꾸역, 우리의 마지막 아사도를 목 끝까지 채워 넣었다. 폐가 부풀어 오를 공간이 없어 숨 쉴 때마다 갈비뼈가 뻐근할 만큼 배가 불렀다. 아사도와의 작별에 최선을 다했다. 한껏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오니 해가 머리 꼭대기 위에서 쨍쨍했다. 눈부시게 아찔한 오후였다. 나른한 행복이 밀려왔다.


  "이제 어디 가지?"

  "라 보카 갈까? 여기서 차로 10분 거리야."

  "배 부르니까 걸어갈까?"

  "그래!"


  차로 금방이니까 걸어서도 금방이겠지, 생각한 건 안일했다. 뭘 몰랐고 무모했다. 깔끔하고 멋진 현대식 고층건물들 밑에서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취했던 걸까. 우리는 호기롭게 걷기 시작했다.


평온한 햇살이 내리쬐던 오후가 공포로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항구 옆의 큰길을 건너 얼마 못 가서 거리는 휑한 느낌을 풍기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물어지고 차들만 쌩쌩 달리는 도로가 계속됐다. 한 달 동안 쓸 수 있다던 유심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고, 믿을 건 GPS가 표시되는 구글맵의 파란 점뿐이었다. GPS가 안내하는 길로 걷는데 조금씩 불안감이 엄습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해맑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걷히는 중이었다.


  "맞아. 이쪽."


  나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최대한 불안을 숨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겁먹으면 오빠마저 겁먹어버릴까 봐 되려 씩씩하게 걸었다. 100미터 앞에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리도. 사람들이 있다는 건 괜찮다는 거겠지,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 둘이 보였다. 한 남자는 윗옷을 벗은 채 맨 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중이었다. 최대한 겁을 먹지 않은 척,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지나치자 싶었다. 맨 몸의 사나이가 약간의 미소를 띤 채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괜히 긴장됐다. 점점 가까워지자 맨 몸의 사나이가 나에게 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외쳤다.


"HI!!!!!"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몸을 피해 그들을 지나쳤다. 그는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서도 우리에게 뭐라뭐라 외쳐댔다. 스페인어라 더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우리는 그의 말이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그들이 멀리멀리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모퉁이를 돌아 골목 안으로 들어와서야 걸음을 멈추고 숨을 내쉬었다. 


  "와,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었어."


  극도의 긴장감이 휩쓸고 지나간 해맑의 뒷덜미는 땀이 흥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오기 전에 우리가 그토록 염려했던, 하지만 그동안엔 느낄 수 없었던 공포였다.


  "그래도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다."


  해맑은 이때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라 보카고 뭐고 그냥 다 떠나고 싶었다고. 이때 오빠가 내게 돌아가자 말하고, 내가 그러자고 했더라면 괜찮았을까. 그러나 용감무쌍한(건지 무모한 건지) 나는 공포의 상황이 끝나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오빠, 지도 보니까 이 골목으로 쭉 가면 라 보카가 나올 것 같애. 이쪽으로 가자."


  골목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방이 고요해졌다. 낯선 곳에서의 고요는 불안을 춤추게 한다. 쿵쾅쿵쾅 불안하게 울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앞으로 걸으면서도 자꾸만 눈동자를 굴렸다. 열심히 눈을 굴려도 보이는 건 굳게 걸어 잠긴 대문들, 창문들, 심지어 쇠창살이나 나무로 만든 덧창까지 꼭꼭 닫혀 있어 집안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집들이 골목 끝까지 이어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굳게 닫힌 대문 안쪽에서 큰 개가 짖는 소리가 컹컹, 들려왔다. 건물들의 외형은 분명히 사람이 사는 주거지역인데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밤도 아니었고, 새벽도 아니었고, 대낮이었는데도!


인기척은 없고 개들만이 소리를 내던 골목
이렇게나 좋은 날씨에 왜 문들은 꽁꽁 닫혀 있는 걸까



  "이쪽으로 가는 거 맞아?"


  해맑이 재차 물었다.


  "이상하다, 여긴 것 같은데."


  GPS에 의존해 길을 찾고 있던 나마저 길을 잃어버렸다. 분명 이쪽 길이 맞는 것 같은데 아무리 걸어도 라 보카의 화려한 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회색의 칙칙하고 빛바랜 건물들만이 무섭게 고요할 뿐이었다.


  "우리 그냥 돌아 나가자."


  해맑이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다 온 것 같은데..."


  극도의 공포 속에서도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헤맸다. 어디선가 자전거를 탄 남자애 둘이 우리를 보고 멈춰 섰다. ‘하이’하고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남자애들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저 아이들이 우리에게 아무 짓도 못 할 거라는 걸 아는데도, 털려봐야 가진 돈과 카메라를 주면 우린 무사할 거라는 걸 아는데도 괜히 겁이 났다.

  사실 그때, (아직도 오빠는 모르고 있지만) 런던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해 호텔에서 소금 같은 피자를 먹던 밤, TV에서 봤던 뉴스가 생각났다. 화면은 밤이었고, 경찰차가 보였고, 누군가 집 안에서 골목으로 총을 쏘고 있는 듯했다. 결국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내용의 뉴스였던 것 같은데 화면 위로 조그맣게 떠 있는 글자들을 봤다. LA BOCA 어쩌고 저쩌고. 스페인어를 모른다 해도 대충 유추해보면 라 보카에서 일어난 총격사건 뉴스인 것 같았다. 라 보카는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가장 위험한 빈민촌이기도 하다. 자전거를 탄 ‘아이들’의 얼굴에서 그 뉴스가 떠오르다니. 하지만 이번에도 해맑에게 말할 순 없었다. 말해봤자 해맑을 더욱 공포로 몰아넣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지나쳐 모퉁이를 도니 골목 끝에 슈퍼마켓이 보였다. 유일하게 문이 열려 있는 슈퍼마켓 앞에서는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 서넛이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저쪽으론 가지 말자."


  그중, 우리를 빤히 쳐다보던 한 아저씨와 눈이 마주친 해맑이 말했다. 해맑의 시선을 따라 나도 그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번엔 내가 말했다.


  "내가 저 아저씨한테 길을 물어보고 올게."

  "뭐?!"


  뭐라고? 길을 물어본다고? 왜? 제정신인가? 아마 해맑은 이런 충격들이 연타로 정수리 위에 내리 꽂히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 놀라 멈춰버린 해맑이 나를 말릴 새도 없이 나는 성큼성큼 그 아저씨에게로 걸어갔다. 아저씨는 여전히 맥주를 마시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바라봤다.


  "웨얼 이즈 라 보카?"


  아저씨와 사람들이 말없이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시했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라 보카?’하고 물었다. 나는 ‘예스, 라 보카!’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아저씨가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말하며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이 미소로 번졌다. 아저씨가 가리킨 쪽을 나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아저씨의 손가락 역시 연신 그쪽을 향했다.


  "오빠! 이쪽으로 가면 된대!!!"


  해맑은 아까 그 자리 그대로 굳어 있었다. (참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위험할 것 같다고 저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나!) 나는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아저씨와 사람들은 우리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너무나 다행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다행이다, 역시 다 사람 사는 동네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험하게 그렇게 막 가면 어떡해!"


  해맑이 나무랐다.


  "무서우니까 그랬지."

  "무서우면 다가가는 거야? 나쁜 사람들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해맑이 어이없어했다. 그럴만했다. 무모한 짓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나는 확인해야만 했던 것 같다. 그들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는 그러지 마. 신혼여행에서 와이프를 잃어버리면 난 어떡해."


  해맑의 따뜻하고 뼈 있는 나무람이었다.


  "알았어, 미안해."


  그리하여 이쯤에서 우리가 라 보카를 찾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행은 늘 혼자 오지 않는다. 불행은 또 다른 불행을 몰고 오지.


  "근데... 나 배 아파."


  극도의 긴장 속에 있던 탓인지 해맑의 배가 꼬여버린 것이다.


  "어? 여기 화장실 없을 것 같은데...?"


  여전히 꼭꼭 걸어 잠긴 집들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난관이 우릴 덮쳤다. 화장실을 찾아야만 한다!

 


  우린 또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린 라보카에 잘 도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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