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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작가 Sep 10. 2021

달콤한 초콜릿 상자, 라 봄보네라

아르헨티나 축구 구단 '보카 주니어스' 홈구장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축구를 사랑한다. 얼마나 축구를 사랑하느냐면, 아르헨티나 축구의 신 마라도나를 믿는 '마라도나교'가 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축구장을 '라 봄보네라', 그러니까 우리나라 말로 '초콜릿 상자'라고 부른다. 축구장을 초콜릿 상자라고 부른다니! 축구에 얼마나 진심인지 모른다.



Estadio Alberto J. Armando  *출처: stadiumdb.com



  라 봄보네라의 정식 명칭은 '에스타디오 알베르토 J. 아르만도(Estadio Alberto J. Armando)'로, 아르헨티나 최고 명문 축구 구단 '보카 주니어스'의 홈구장이다. 마라도나가 바로 이 보카 주니어스 출신의 축구선수다. 보카 주니어스로 말할 것 같으면, 주요 대회에서 48개의 타이틀을 획득하고 국제 타이틀 수는 AC밀란과 함께 세계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


  라 봄보네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라 보카'지구에 있다. 라 보카는 탱고의 발상지로 더 유명한 곳인데, 흔히 알록달록한 색깔로 칠해진 집들로 더 유명한 곳이다.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도 않지만 월드컵이나 올림픽, 국가대표 경기가 있을 때엔 그래도 꼭 치킨을 시켜서 응원하는 정도로 미온적인 팬인데, 이상하게 라 봄보네라는 꼭 가보고 싶었다. 아마도 순전히, 초콜릿 상자라는 별명 때문이었으리라.



길 이름도 수아레즈. 그런데 수아레즈는 우루과이 선수인데 왜...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후미진 뒷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고, 설상가상 해맑은 극도의 긴장감이 몰려온 탓인지 배탈이 난 상태였다. 대문은 물론이고 창문도 모두 덧문으로 꽁꽁 걸어 닫힌 후미진 주택가 한가운데서 화장실을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떻게든 라 보카를 찾아가야 했다. 라 보카가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식당이나 카페가 나오길 간절히 기도했다.


  "나 진짜 더 이상 못 가겠어."


  공포와 긴장과 배탈과 더위와 멘붕에 녹다운된 해맑이 외쳤다. 나는 die.


  "그럼 여기서 어떡해?"


  아무리 가도 라 보카는 안 나오고, 해맑은 배탈이 났고, 여긴 화장실이 없고. 어떡해야 해?


  "라 보카를 꼭 가야겠어? 안 가면 안 돼?"


  "아니, 라 보카를 꼭 가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오빠 화장실 찾으려고 그러는 거야. 거기 뭐 카페라도 가야 화장실이 있을 거 아냐."


  나도 나대로 날이 서버렸다. 이쪽으로 가라는데 아무리 가도 라 보카는 안 나오지, 해맑은 배가 아프다고 하지, 카페도 없지, 공중화장실은 더더욱 없지, 근데 지금 거길 꼭 가야겠냐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화가 먼저 터지나, 눈물이 먼저 터지나, 아니면 해맑바지가 먼저 터지나 어디   겨뤄보자, 싶을 때쯤...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보카 주니어스의 홈구장 '라 봄보네라'



라 봄보네라!



그리고 그 맞은편에, 문이 활짝 열린 카페가 있었다.





  카페를 보자마자 해맑은 얼른 화장실로 냅다 뛰었고, 나는 라 봄보네라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에서 콜라를 한잔 시켜놓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달콤한 순간을 선물해주는 너는 진짜 라 봄보네라구나, 하며.



  가뿐한 상태로 돌아온 해맑을 보고 나는 신이 나서 외쳤다.


 "오빠! 저게 라 봄보네라야! 와, 라 봄보네라가 갑자기 나오다니! 와!"


  카페 입구엔 마라도나와 메시 동상이 있었다. 나는 한껏 신나 그 동상과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고, 라 봄보네라 앞에서도 사진을 찍고, 언제 또 여길 와 보겠나 싶어 뭉클해하며 해맑에게도 사진을 찍어줄까 하고 물어봤는데 해맑의 대답은...



  "난 축구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날 난 처음 보았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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