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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숙 Oct 27. 2022

'최고 금수저' 고려 순경태후,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진강산 자락 가릉... '충렬왕의' 어머니로만 기억

민들레꽃이 진 자리에 하얗게 홀씨가 달렸다. 살짝 손만 대도 흐트러져 버릴 것 같다. 호기심이 동한 아이가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민들레 홀씨들이 날아올랐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홀씨는 둥둥 날아간다.


바람에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를 따라 걷는다. 길을 사이에 두고 키 낮은 집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낯선 길손이 반갑지 않은지 개들이 컹컹 짖어대는데 담장 안의 모란꽃이 농염하게 피어 있다.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동네를 걷는다. 마을 뒤 산에는 고려 왕릉이 있다. 작은 시골 마을 뒷산에 무슨 왕릉이 있단 말인가. 그것도 고려시대 왕릉이라니... 구미가 동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강화 능내리 고려왕릉


기대했던 왕릉은 없고 자그마한 무덤 한 기가 있을 뿐이다. 안내판이 없었다면 여기가 고려 왕릉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조선시대 왕릉들은 규모도 크고 대단하던데 여기 이 왕릉은 보통의 무덤 같다. 강화도의 한 시골 마을 뒷산에 조촐한 모습으로 있는 고려왕릉, 어떤 사연으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사적 제370호 강화가릉 전경



강화가릉(江華嘉陵)은 고려 원종(재위: 1259년~1274년) 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왕비의 무덤이 왜 강화에 있는 걸까. 그것도 고려시대 무덤이 말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답을 알려줄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가릉 근처에 또 한 기의 고려 고분이 있다. 봉분 둘레를 꾸민 난간과 난간지대석으로 봐서 가릉보다 더 규모도 크고 화려하다. 그렇다면 저 무덤도 왕릉일까?


강화도 진강산 자락에는 알려진 고려 왕릉만 해도 3기에 이른다. 고려 희종(재위: 1204년~1211년)의 무덤인 석릉을 비롯해서 고려 강종(재위:1211~1213)비 원덕태후의 무덤인 곤릉 그리고 가릉이 있다. 가릉 뒤에 있는 능내리 석실분까지 합하면 4기나 된다. 석릉 인근에도 고려시대 고분이 있어 발굴 조사 중이라고 하니, 도대체 진강산 남쪽 자락은 고려 왕가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걸까?


고려 원종비 순경태후의 가릉


1231년 몽골이 쳐들어왔다. 고려 조정은 난리를 피해 강화로 천도(1232년 7월)했다. 그 후 다시 개경으로 환도(1270년)하기까지 39년간 강화는 고려의 실질적인 수도였다. 당시 강화 인구가 삼십만 명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강화가릉



39년이라면 긴 시간이다. 그동안에 수명을 다한 사람들은 강화에 묻혔을 것이다. 강도(江都) 시기에 죽은 왕과 왕비들도 그렇게 강화에 묻혔다. 고려산 자락에 있는 고려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서 진강산 자락에 있는 석릉, 곤릉 그리고 가릉까지 모두 강화도 천도시기의 고려 왕릉들이다.


영원한 삶을 기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덤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계층 간의 구별이 뚜렷했던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무덤을 통해서도 묻혀 있는 사람이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피장자(被葬者)의 신분에 따라 무덤의 명칭이 달랐으니 능, 원, 총, 분, 묘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최우의 외손녀충렬왕의 어머니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왕세자와 세자빈 또는 왕세손과 세손빈의 무덤에는 '원'을 붙인다. 왕족이라 하더라도 왕위와 관계없는 이는 일반인과 같은 '묘'라 불리었다. 규모로 봐서는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그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총'을 붙인다. 또 발굴이 되지 않아 무덤으로만 추정되는 것들을 통틀어서 '분'이라고 한다.


가릉은 고려 24대 원종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의 외할아버지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이고 외증조부는 최충헌이다. 최우는 정실부인에게서 딸 한 명밖에 얻지 못했는데 그이가 바로 가릉의 주인인 순경태후의 어머니이다.


강화가릉 발굴 사진



순경태후의 아버지는 김약선으로 그는 당시 임금이었던 고종의 신임을 듬뿍 받던 문신이었다. 이런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순경태후 김씨는 요즘 말로 해서 '금수저' 중의 '최고 금수저'였던 셈이다.


순경태후가 세상을 떴을 때 시아버지인 고종은 이규보로 하여금 '동궁비주애책문(東宮妃主哀冊文)'을 짓게 하였다. 태후의 미덕을 칭송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글이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음을 강조하는 문구도 보이는 걸로 봐서 순경태후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규보가 쓴 동궁비주애책문(東宮妃主哀冊文)


'정유년 7월 29일 경목현비 김씨가 병에 걸리어 사당리(祠堂里)의 사제(私第)에서 운명하자, 곧 서울(강화 천도 시기이므로 여기서는 강도가 되겠다) 남쪽의 본가로 옮겨 초빈하였다가, 10월 초7일에 가릉(嘉陵)에 장사하였으니,(중략) 예(禮)를 후비(后妃)의 의식에 따르니 국도(國道)에 빛이 난다. 동궁이 가슴 치는 것을 생각하매, 내 마음의 비통이 더해진다.(중략)


하늘이 금궤(金櫃)를 내리니 경사의 근원이 처음으로 열렸다. 바른 혈통이 서로 이었는데, 너는 그 후손이었다. 외가는 어떤 집인고. 대대로 대려(帶礪)를 맹세하였다. 적선이 모인 곳에 유전하는 꽃다움이 침체되지 않았다. 순하고 곱디고운 숙원(淑媛)은 유순하고 또 은혜스러웠다. 난초처럼 빼어나고 옥처럼 고왔다. 동궁에 배필이 됨은 빈틈없이 맞는 일이었다. 마땅히 집안을 이어서 능히 영원히 전하리라 생각하였더니, 어찌 그리도 복록이 없어서 홀연히 갔는고. 14세에 빈(嬪)으로 와서 16세에 가버렸다.(하략)' - 한국고전번역원 장순범 역


(금궤(金櫃) : 여기서는 순경태후의 조상인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금궤에서 나왔다는 고사를 가리킨다. 대려(帶礪) : 공신(功臣)의 집이 길이 작록(爵祿)을 누리게 하는 일.)


강화가릉 내부



이따금씩 산비둘기가 울어댈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중에서 가릉의 주인인 순경태후를 생각한다. 최우의 외손녀로 태어나 14세에 원종과 결혼하여 태자비가 되었고,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으니 충렬왕이다. 아들을 낳은 다음 해에 병에 걸려 16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잠시 잠깐 머물다 간 이 세상이었으나 생전에는 최고의 삶을 살았으리라.


'누구의'로 통칭되는 순경태후


순경태후는 원종이 태자가 되기 이전 입궐하여 경목현비(敬穆賢妃)로 책봉되었다. 1235년(고종 22)에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원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순왕후(靜順王后)로 올려 드렸고 아들인 충렬왕이 즉위하자 죽은 어머니를 높이 받들어 순경태후라는 칭호를 드렸다. 태자비였고 왕비였으며 왕의 어머니인 태후까지 되었으니,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또 최고 호칭으로 불린 셈이다.


하지만 순경태후의 이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녀의 외할아버지(최우)도 아버지(김약선)도 또 시아버지(왕철)와 남편(왕식), 그리고 아들(왕거)까지 이름이 다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순경태후의 이름은 없다. 그녀를 나타내는 말은 모두 '누구의'로 통칭이 된다.


우리 역사 속에서 여자는 이름 없는 존재였다. 자신 단독으로는 그려지지 않고 누구의 딸로 또는 누구의 아내로 그리고 누구의 어머니로만 그려지고 존재한다. 오만 원 권 화폐에 올라가 있는 신사임당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율곡(栗谷)의 어머니로 더 크게 불린다.


석실 앞에 석인상(石人像)이 동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봉분 뒤쪽 양 모서리에 석수(石獸) 한 쌍이 있다.



과거에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 했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그리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과거 삼종지도에서 가르쳤던 덕목이었다. 여성을 독자적이고 온전한 한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고 남성에게 의존하는, 종속적인 존재로 생각하였다.


역사 속 이름 없는 여자들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남성의 그늘 속에 존재했던 여성은 죽어서도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제사 때 쓰는 지방에도 여성은 본관과 성만 기록할 뿐 이름은 없다. 족보에도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세상의 절반은 여자인데 실제 기록 속에서는 여성을 볼 수 없다.


가릉의 주인인 순경태후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녀를 나타내기 위해서 외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그리고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까지 망라했다. 그녀는 그 모두와 연관이 있지만 그녀 자신은 아니다. 여전히 순경태후가 누군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름은 무엇이었으며 언제 태어나고 또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고려사>에는 순경태후를 둘러싼 이들의 행적은 남아 있지만 정작 그녀는 없다. 누구의 외손녀, 누구의 딸, 그리고 누구의 아내였고 누구의 어머니로만 기록되어 있다. 가릉에서 이름 없이 살다간 여인들을 생각해 본다.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만 기억되는 그녀들을 본다.


강화가릉은 고려시대 왕릉을 직접 접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그 의미가 있다. 인천광역시에서는 강화가릉을 포함한 강화 소재 고려 왕릉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세월이 바뀌어 제 이름으로 사는 여자들


바람에 날려가던 민들레 홀씨들은 땅으로 내려와 안착을 했다. 멈춘 곳이 어디냐에 따라 홀씨들의 운명은 달라질 것이다. 거름기 많은 땅에 떨어진 홀씨들은 내년 봄에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릴 것이다. 더러 운이 없는 홀씨들은 아스팔트 포장도로 틈 사이에 떨어져서 힘겨운 한 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 태자비가 되었던 순경태후는 운이 좋은 홀씨였던 셈이다. 비록 제 이름으로는 살지 못했지만, 그것이 그 시대의 마땅한 이치였으니 어찌 하랴. 지금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녀도 제 이름으로 살았을 것이다.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살아갔을 것이다.


앞장서서 가던 초등학생 민주가 뒤를 돌아보며 엄마를 부른다. 그러자 민주엄마가 아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들어준다. 민주엄마를 우리는 '성은 씨'라고 그녀의 이름으로 부른다. ‘성은' 씨는 민주 엄마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당당한 여성이다. 역사 속의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지만 지금 시대의 여성들은 자기 이름으로 살고 기억된다.



덧붙이는 글 | 강화 가릉 (江華 嘉陵)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으로 사적 제370호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봉분이 붕괴되고 주변 석물이 없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 정비하였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사업을 시행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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