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님을 보고자 하나 만날 길이 없사옵니다.”
전등사 대웅전 바닥에 엎드려 여인은 빌고 또 빌었다. 애타게 지아비를 불렀다. 태자비로 지낸 세월이 17년이었다. 슬하에 자식들도 여럿 두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에게 왕비의 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태어난 왕자 역시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고려 25대 충렬왕(재위 1274~1308)의 정비였던 정화궁주(貞和宮主) 이야기다.
고려 왕실은 전통적으로 같은 왕족끼리 혼인을 하는 근친혼을 했다. 왕실의 권위와 경제적 기반을 지키기 위해 제1비는 반드시 왕족에서 얻었다. 태자비였던 정화궁주도 왕가의 후손이었다. 고려 20대 왕인 신종이 정화궁주의 증조부였으니 충렬왕과 정화궁주는 촌수가 가까운 혈족 사이였다.
왕비가 되지 못한 태자비
두 사람 사이에 자녀도 셋이나 태어났다. 시절이 평화로웠다면 정화궁주는 왕비가 됐을 것이고 그녀의 아들은 부왕의 뒤를 이어 고려의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고려는 정략상 원의 부마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화궁주는 별궁으로 내쳐졌고, 이후 다시는 충렬왕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정화궁주를 내쫓고 대신 제1왕비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원나라의 제국대장공주였다. 제국대장공주는 칭키즈칸의 손자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Kublai Khan,1215~1294)의 딸이다.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했다. 그녀에게 정화궁주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별궁으로 내치고 충렬왕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정화궁주의 슬픔과 한이 얼마나 크고 깊었을까. 태자비로 17년간이나 있었는데도 정치적인 힘에 밀려 정작 왕비는 될 수 없었으니,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불교에 마음을 두었고, 전등사에 옥등과 대장경을 시주했다.
정화궁주가 바친 옥등은 불법을 널리 전하는 등불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물리치는 것처럼 불법을 널리 펼쳐 이 세상을 돕고자 함이 옥등에 담겨 있다. 정화궁주가 옥등을 바친 이후로 절 이름도 진종사에서 전등사로 바뀌었다.
정화궁주, 전등사에 옥등을 바치다
고려의 대시인이었던 목은 이색(1328~1396)은 정화궁주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담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星歷蒼茫五太士 먼 옛날 오태사의 일은 까마득한데
雲煙慘淡三郞城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에 아득하네
貞和願幢誰更植 정화궁주의 원당을 뉘라서 고쳐 세우리
壁記塵昏傷客情 벽기에 쌓인 먼지 나그네 마음 상하게 하네
– 대조루에 올라서서(登對潮樓)
전등사에는 정화궁주의 설움이 담겨 있다.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죄로 정화궁주는 마땅히 누려야 할 왕비의 자리도 내줘야 했다. 태자비가 이러했을 정도였으니 보통의 여인들이 겪었을 고초는 오죽했을까.
제국을 완성한 몽골은 나라 이름을 ‘원’으로 바꾸고 고려에게 금은보화를 비롯한 많은 공물을 요구했다. 그 속에는 '특정한 일에 종사할 사람을 보내라'는 것도 들어 있었다. 궁중에서 일할 궁녀를 뽑아서 보내라는 요구였다. 고려는 이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어 역적이나 천민의 아내와 딸들을 보냈다. 이렇게 보내어진 여자를 '공녀(貢女)'라고 하는데, 이후로도 원나라는 계속 공녀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공녀’로 끌려간 고려 여인들
원나라는 고려를 비롯한 제후국에서 궁녀를 뽑아갔다. 원나라 황실에서는 고려 출신 궁녀들을 선호했다. 고려 여인들은 피부가 희고 고왔을 뿐만 아니라 유교 교육을 받고 자라 교양이 있었다. 그래서 원나라의 황실뿐만 아니라 권세가들까지 고려 여인들을 찾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보통 계급의 사람을 뽑아 공녀로 보냈지만, 원나라에서는 명문가의 딸을 보낼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공녀로 간 명문가 딸 중에 기씨 성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황실에서 일하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됐고, 몽골 출신의 여인만이 황후가 될 수 있다는 철칙이 있었는데도 황제는 이를 어기면서까지 고려 출신의 기씨 여인을 황후로 삼았다.
‘기황후’의 사례를 접한 고려의 고관대작 중에는 딸을 원나라로 보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딸이 원나라 고관의 아내가 되거나 황제의 후궁이 되면 고려에서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의 경우일 뿐 대개는 딸이 공녀로 뽑힐 것을 두려워해 숨기기에 바빴다. 이역만리 낯선 곳에 딸을 보내고 싶어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녀를 뽑으러 사신이 오면 딸을 숨기고 내놓지 않아 나라에서는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치고는 했다.
조혼의 풍습까지 생겼다니….
당시 공녀로 징발되는 모습을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기고, 드러날까 두려워 이웃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원나라 사신이 오면 군인과 관리가 집집마다 수색하여 만약 여자를 숨기기라도 하면 이웃을 잡아가두고 친족까지 잡아들여 나라를 소란케 한다. (중략) 뽑힌 여자의 부모와 친족은 밤낮으로 울어 곡소리가 끊이지 아니하고, 떠날 때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쓰러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 목매어 죽는 자,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와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다."
집집마다 딸을 감추어 두고 내놓지 않으니 여인들을 수색하느라 전국이 마치 전쟁터나 매한가지였다. 개들도 낯선 수색원을 보고 어찌나 짖어댔던지 "개들도 편안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조혼의 풍습까지 다 생겼을까. 공녀로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일찍 결혼을 시키는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딸이 열두 서너 살만 되면 서둘러서 혼인을 시켰다.
1274년(원종 15년)에 시작된 몽골의 공녀 요구는 충숙왕 4년(1335년)에 이르러서야 폐지됐다. 하지만 이후로도 암암리에 공녀 요구가 계속되다가 원나라의 패망과 함께 끝났다. 무려 80여 년간 고려의 여인들이 원나라로 뽑혀 가고 끌려간 셈이다.
역사 속 여인들의 수난
과거 우리나라는 힘이 없어 자국의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경우가 왕왕 있었다.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도 그러했다. 두 번의 왜란을 비롯해서 정묘년과 병자년의 호란 때도 수많은 사람이 죽고 또 적국에 끌려갔다. 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선으로 끌려가거나 탄광이나 공장 노동자로 가서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수난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더 짓밟히고 핍박을 받았다. 고려시대의 ‘공녀’, 병자호란 때 ‘환향녀’, 그리고 일제시대에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희생됐다. 그 후로도 여성들의 수난이 있었다.
정화궁주의 설움이 담겨 있는 전등사에서 역사 속 여인들의 애환을 생각해 본다. 나라가 존재하는 이유는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이기도 한데, 그것은 천 년 전 고려시대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어떨까. 전등사 마당에 서서 오늘의 우리나라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