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엘리엇의 책 제목 그대로 따왔습니다.
역지사지에 대한 대표 문구 하나를 택하라면 망설임 없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다음 격언을 택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 때문에 힘들 때가 있습니다. 상대가 날 힘들게 하거나, 내 쪽에서 상대가 맘에 들지 않거나 할 때죠. 어차피 날마다 마주쳐야 할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린 어른이니까요.
내 삶이 피로하다는 이유로 타인에 대한 이해 단계를 생략하고 내 편인가 아닌가, 나와 맞는가 아닌가만 정하면 당장은 편한 것 같아도 결국 내게 좋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성장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진득한 고민에서 싹트는 법이니까요. 고민의 흔적으로부터 길어 올린 말들이 그 사람의 향기가 되어 좋은 벗들을 끌어들입니다.
가수 이효리가 후배 아이유에게 했던 말이라고 하네요.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맬수록 절대 만날 수 없어. 다만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여 가꾸며 조급하지 않을 때에 자연스레 좋은 사람이 와.”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 중 으뜸 되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아닐까요? 누구나 이해받고 싶어 하잖아요. 바다의 모래알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면 많은 사람이 쉬어 가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본인 인생도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니 남이 아닌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의 모카신을 즐겨 신어보아요.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자는 이 시대의 구호는 눈치 보느라 지친 문화에 대한 자기반성과 고찰이지 누군가를 사랑해 보기도 전에 귀찮다는 이유로 단절을 택하는 나태함을 옹호하는 구호로 삼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미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자고 다짐하지 않아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사람은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일에 총력을 쏟아 회복하길 바라며, 나사랑 구호는 그런 이들에게 돌려줍시다. 그럭저럭 오늘 하루 살아낼 에너지가 있고, 성장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나르시시즘적인 나사랑’을 내려놓고 상대의 모카신을 신으러 가보아요. 그게 더 이득입니다.
사회생활이란 건 나사랑 80이면 남사랑 20, 나사랑 20이면 남사랑 80, 이런 제로섬 게임이 아니더군요. 사랑이란 건 흐르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나사랑이 채워지면 남을 사랑할 힘이 생기고, 남을 사랑하면 내 안에도 사랑이 들어찹니다.
꼬인 사람, 말라버린 사람, 무기력한 사람, 인색한 사람이 눈에 보인다면 고개 숙인 꽃에 물을 주듯 사랑과 이해를 부어주어야 해요. 태생적으로 그런 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어떤 이유로 그런 상태가 된 거라서요.
‘푸른 눈, 갈색 눈 차별 실험’을 아시나요? 1968년, 미국의 초등학생 선생인 제인 엘리엇은 ‘1968년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에 대한 백인들의 반응에 분노하며 인종주의에 맞서기 위해 실험을 합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신체적 특징 중 하나인 눈동자의 색 하나로 푸른 눈 그룹과 갈색 눈 그룹을 나눕니다. 갈색 눈은 우대하고, 푸른 눈은 차별하죠. (갈색 눈은 백인 남성을, 푸른 눈은 유색인, 여성, 소수십단 등을 상징합니다.) 이 실험은 당시 많은 반발을 일으켰고, 방송을 타고 화두로 떠오르기도 하며, 기업 연수로까지 확장됩니다. 차별받는 푸른 눈 그룹의 반응은 늘 동일했습니다. 분노하며 항의하거나 무기력해졌죠. 그럴 수밖에요.
실험을 위해 제인 엘리엇이 장치하고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갈색 눈은 바로 강당으로 바로 입장시키고, 푸른 눈은 복도에 오랜 시간 대기시킨다.
갈색 눈은 의자에 앉히고 푸른 눈은 바닥에 앉힌다.
푸른 눈의 소지품은 위험하다며 쓸모없는 물건은 테이블 밑에 보관하도록 명령한다. (후에 사회자는 펜과 종이를 준비하라 지시하고 푸른 눈이 테이블로 가면 “이봐요! 어디 가는 거예요! 당장 자리에 앉아요!” 명령하고 “펜과 종이는 어디에 있나요?” 묻는다. 가방에 있다고 대답하면 왜 가지고 있지 않느냐 반문하고 가방을 테이블 밑에 두라 하지 않았냐 물으면 사회자는 한숨과 함께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내가 펜과 종이를 테이블 밑에 두라 했나요? 필기구가 쓸모없는 물건인가요? 푸른 눈은 이렇게 준비성이 없고 유연한 사고가 불가능하다니까” 등으로 대응한다.)
푸른 눈의 어떤 말이나 주장이든 실수하도록 유도하여 푸른 눈은 원래 어리석고 교육이 부족한 존재로 각인시킨다.
푸른 눈이 저항하거나 분노하면 ‘그들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증명으로 삼는다.
어처구니없는 차별을 하고, 오히려 차별에 대한 반응을 ‘그들이 열악하다.’는 증거로 삼는 거죠. 백인들이 갖는 편견을 그런 식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흑인들은 원래 폭력적이고, 비협조적이고, 저항하거나 무기력하다는 백인들의 주장은 사실 ‘차별에서 오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에 근거한다는 걸 일깨우죠. 백인들도 차별받으면 분노하고 저항하고 협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백인들은 단 몇 시간의 워크숍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유색인종이나 소수그룹들은 평생 그런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까요?) 그렇게 ‘편견이 차별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이 편견을 초래한다.’는 것을 주장한 실험이고, [다른 사람 모카신 신고 1마일 걷기]라는 책을 통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2022년 7월, 어느 유플리더분이 윈디와의 대화 채널에 ‘필패 신드롬’에 대한 내용을 남긴 적이 있었어요. 아픈 경험이지만 다시 한번 꺼내는 이유는 이러한 필패 신드롬 역시 편견에 근거하며, 편견이란 걸 알아야 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패 신드롬(Set-up-Fail syndrome)이란?
하나의 계기로 상사(이하 A)는 부하직원(이하 B)의 능력에 의심을 품는다. A는 B의 업무를 좀 더 철저히 감독한다. B는 자존심이 상하고, 업무 의욕마저 잃는다. A는 B의 능력이 점점 더 의심스럽다. B의 업무에 더 많이 개입한다. B는 업무를 소홀히 하고, 급기야 A에게 반발한다. A는 B의 무능함을 확신한다.
드러나는 경우가 있고, 은연중에 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상황이든 좋을 게 없으니 당사자든 주변인이든 이런 필패 신드롬의 조짐을 발견할 때 상황을 정확히 보고 정리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때 필요한 게 바로 ‘다른 사람 모카신 신고 1마일 걷기’ 아닐까요? 누군가가 나를 판단하고 단정 짓는 게 싫듯이 나 역시 누군가를 단면만 보고 판단하여 단정 짓지 말아야겠습니다. 나만 봐도 어제 맘과 오늘 맘이 다른데, 뭐라 정의하기 힘들 정도로 입체적이고 복잡한 존재인데, 타인에 대해 결론지으면 쓰나요?
어느 조직에 속했을 때의 경험을 잠깐 얘기하자면, 무기력한 태도가 만연해서 뭘 하려 해도 ‘에휴. 하라면 해야지 뭐.’라며 억지로 일하는 게 보였어요. 앞단에서 이끌어가야 했던 필자는 당시 ‘지금까지 달리느라 지쳤나 보다, 누구나 방전될 때가 있지.’라며 지금은 내가 에너지가 있으니 내가 하자며 열심을 냈습니다. 저 사람이 충전되어야 내가 에너지 떨어졌을 때 힘을 내줄 거야, 란 마음이 있었고요. (실제로 내가 지쳤을 때는 다른 누군가가 으쌰으쌰 하며 질주하더군요.)
누구나 실수하고, 누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고, 누구나 방전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뭘 해도 되는 때, 정점일 찍는 때, 열정이 넘치는 때도 있습니다. 조직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때가 유연하고 긍정적으로 융합할 때 발전한다고 해요. 유능한 사람들만 모인 조직, 한결같이 실력이 출중한 조직은 유니콘이랄까요? 상상에나 가능한 조직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실패, 실수, 오해, 갈등을 슬기롭게 봉합하는 과정이 발전을 이끌어내며, 그 과정에서 필수가 되는 게 이해입니다.
우리 유플리더분들이 유플리트라는 조직에서 다양한 모카신을 신어 보길 소망합니다. 입어본 사람이 잘 입고,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 법. 다양한 모카신을 신어 본 경험이 각자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거예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겠죠.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당장의 인내가 고통스럽겠지만, 머잖아 맛볼 열매는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같지 않겠어요? 인생을 맛있게 살려면 소금 같은 조미료가 꼭 필요한 법, 인내할 줄 아는 유플리더분들이 되길 소망하며 간만의 유플위클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