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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Feb 28. 2024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을까?

올림픽이라는 세 글자의 무게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올림픽 담당자라니. 말하는 대로 된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구나.


처음 텔레비전으로 본 올림픽은 애틀랜타 올림픽이었다.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듯 온 힘을 다해 상대방과 실력을 겨루는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쯤 난 책만 좋아하는 어린이에서 책 보다 스포츠를 더 좋아하는 소년이 되었다. 방과 후마다 친구들과 아파트 공터에서 축구공을 찼고, 주말에는 넓은 운동장에서 야구공을 치고 그라운드를 달렸다. 키가 훌쩍 자라고 수염도 나기 시작한 시드니 올림픽쯤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농구공을 던졌다. 흙바닥에서도, 눈 쌓인 코트에서도. 야자 시간에 수리 문제를 붙잡고 있을 때도 빈 연습장에 제리 맥과이어 같이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 활약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런 소년이 어느덧 어엿한 회사원이 되어 올림픽 업무를 담당하다니. 텔레비전이 아니라 이 두 눈으로 보게 된다니. 이 건 그냥 회사일이야 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행복한 꿈만 같았다.




만 스물여섯 살에 입은 뻣뻣한 셔츠와 딱딱한 구두가 아버지 물건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대학생 때 어느 한 길을 걷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취직에 대한 고민만 가득했다. 암울한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안정적인 회사를 가야만 하는 줄 알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 주변 친구, 선후배들을 따라가야 하는 줄만 알았다. 대학생활을 허투루 보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회사 중 괜찮아 보이는 곳에 무작정 지원했다. 그 회사들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장기적으로 나는 어떤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지, 그곳이 내 역량과 기질에 맞는 곳인지 등 중요한 질문은 내 셔츠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취업에 도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회사에 합격하였다. 지원한 많은 회사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지원한 곳이었다. 운 좋게 붙었다는 생각, 더 이상 취업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남들처럼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 수 있다는 안도감. 동기들보다 앞서간다는 알량한 우월감까지. 졸업장 보다 합격 메일을 먼저 받은 것만으로도 내 대학 생활은 충분히 보상받은 것 같았다. 합격 발표 후 두어 주만에 바로 출근했고, 첫 출근 며칠 뒤 일반 사무직 경쟁률이 무려 천 대 일을 넘었다는 말을 들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하얀 명함 위 내 이름 석 자가 부담스러웠다. 다른 지원자만큼 간절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되는 걸까,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나를 붙잡았다. 신입 사원의 패기란 말은 나에게 맞지 않는 단어였고,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사무실 공기는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올림픽 실무를 담당할 거라는 건 대회 반년 전쯤 알게 되었다. 입사 9개월 차가 될 무렵, 나를 제외한 팀 구성원 모두가 순차적으로 바뀌었다. 우리 팀과 선배들의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내심 굉장히 섭섭했다. 런던 올림픽 마무리 업무를 함께 하고, 그동안 네 번의 대회를 무사히 치르며 내 마음속에 동료애가 자랐던 것 같다. 첫 동료들을 떠나보낸 아쉬운 마음은 금세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소치 올림픽을 반년쯤 남긴 시점에 내가 국제대회 담당 경험이 있는 유일한 직원이었다. 새로 만난 얼굴들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보고 싶지 않은 얼굴로 느껴졌다. 상사 몇 명이 업무 분장 회의를 진행했다. 담배와 커피를 곁들인 그들만의 짧은 비공식 회의 후, 내가 올림픽 업무를 담당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예상했지만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아직 입사 1년도 채우지 못했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이렇게 금방 맡게 되다니, 그동안 나처럼 어린 나이와 낮은 연차에 올림픽을 담당한 사람이 없다는데. 내 역량을 인정받은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하면서도,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고개가 떨구어졌다.


올림픽은 우리 팀 업무 중 가장 규모가 컸고, 회사 차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많은 사람들과 정부, 언론의 관심과 기대도 컸다. 내가 좋아한 만큼, 올림픽이라는 세 글자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선수단이 정식으로 꾸려지는 대회 한 달 전쯤부터 많은 직원이 투입되지만, 그때까지 선수단 파견 관련 모든 업무를 우리 팀에서 처리해야 했다. 당시 팀원은 네 명이었고, 과장 한 분과 내가  올림픽을 담당하게 되었다. 과장님은 국제 대회를 담당해 본 경험은 없지만, 다양한 업무 경험이 있었고 회사 안팎으로 발이 넓고 업무 추진력이 좋은 편이라 믿음을 가져 보려 했다.


본격적인 대회 업무는 2013년 8월말부터 시작되었다. 조직위원회와 연락을 주고받고, 예산 계획과 업무 일정표를 짜고, 사업계획서 초안을 만들어 내부 보고를 올리고, 정부기관, 의류 제작 업체, 항공사 등 파트너들과 얼굴을 맞대기 시작했다. 사업 내용이 조금씩 뚜렷해지자 대회 현장에 가 있는 내 모습도 조금씩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2013년 10월, 내가 담당하고 있던 다른 대회를 위해 보름 정도 중국에 파견을 갔다. 대회가 끝난 후 회사에 돌아오자 내 모든 시계는 올림픽이 시작되는 날로 맞춰졌다. 폭포수처럼 흐르는 세 달도 채 남지 않은 모래시계를 쳐다보며, 잠시 쉴 틈도 없이 매일 밤 회사 건물 8층의 불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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