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의 길을 선택한 걸까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알잖아. 우리 부모님이 너 싫어하는 거. 너희 부모님 이번에 이혼하셨잖아. 그리고 이제 결혼할 때라 다른 여자 더 만나보길 원하셔."
"....."
새벽 한 시, 단 한통의 전화로 5년의 우린 끝났다.
20살, 우리는 동아리 방에서 처음 만났다.
낡아서 녹이 진득이 쌓인 문을 열자마자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모자를 눌러쓰고 게임을 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등 돌려 눈을 흘기며 내게 말했다.
"회비 꼭 내라, 안 낼 거면 들어오지 말고."
얻다 대고 초면에 반말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는데, 까칠한 태도가 은근 웃겨서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나랑 똑같이 20살, 동갑인 남자애, 말투는 진짜 재수 없는데 항상 옆에 있어 주는 남자애, 배고프다고 하면 항상 가던 치킨집으로 불러 마늘 통닭 한 마리랑 맥주 한 잔 시켜주고 내가 먹는 모습만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애,
남들 다 그렇듯, 그렇게, 그런 식으로 연애를 시작했고 우린 진지해졌다.
"나 금방 돌아올게. 2년 별거 아냐 알지? 총 잘 쏴서 휴가 많이 받아 나올게. 아프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편지할게. 그리고 너 사진 꼭 보내줘. 보면서 힘낼게. 사랑해."
눈 내리는 날, 전주까지 내려가 입대하는 그 남자의 가족들과 함께 배웅했다. 눈물은 그의 어머니께 양보해 드리고 싶어 꾹꾹 눌러 참았다.
군대에 가서도 참 애틋했다. 서울에서 전주, 전주에서 서울,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쪼개고 쪼개 만났다. 훈련소에서는 백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 백수 여친을 뒀냐는 부러움의 핀잔도 받았노라 말했다. 그래도 마냥 행복했다. 첫 휴가 때는 세상 무너지듯 울고 불고, 몰래 휴가 나와서 장미꽃 한 송이 들고, 힘들게 일하고 온 내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노라 모든 사람들이 말해도, 우리 사랑은 정말 변함이 없다고 우린 말했다.
아니, 적어도 나는 믿었다.
제대가 다가올수록 우린 멀어졌다. 그에게 권태기가 온 걸 알 수 있었지만, 그냥 모른 체 했다. 그게 첫 실수였을까? 우린 그때 끝나는 게 맞았을까? 이별에도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제대 후, 복학하고 나니 어느덧 3년이 넘은 커플이 되어있었다. 주변에선 남자 친구에게 군대도 기다려줬으니 이제 넌 빼도 박도 못하고 결혼해야 하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그가 불편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외려 내가 더 무안해졌다.
그러고도 우린 2년을 넘게 더 만났다. 그에겐 이제 내가 여자 친구가 아니라 엄마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자취방에 가서 빨래해주고, 세탁소 가서 옷 찾아오고, 인스턴트 도시락에 학식만 먹는 그가 안쓰러워 못난 솜씨로 가끔 밥도 해줬다. 그의 작은 자취방 곳곳에 쪽지며 편지며 두었지만 그는 읽지 못했다. 편지지에 수북이 쌓인 먼지가 그걸 증명해줬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만남에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곤히 자고 있는 저 남자의 얼굴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예감. 서글프게도 그 예감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것이 정말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5년의 끝. 엔딩 장면.
"5년이나 사귀었는데, 헤어지잔 말을 어떻게 전화 한 통으로 해? 우리가 그것밖에 안 되는 사이였어?"
나는 드라마에 나올법한 진부한 대사 같은 말들로 그를 나무랐다.
"만나면 마음 약해질 거 같아. 너 물건도 그냥 택배로 보낼게. 와서 찾아가지 않아도 돼."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나의 손을, 손가락 하나하나를 그가 떼어 놓아버리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연애는 푸른 언덕 위에, 큰 느티나무 아래에, 햇빛 들지 않는 그늘에 앉아 쉬는, 그런 따듯한 사랑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그동안 절벽을 오르고 있던 걸까?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나의 손이 미끄러졌다. 발버둥도 칠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5년의 나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 삐---. 5년의 시간이 사망하셨습니다.
우리 정말 이대로 끝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