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수꾼>은 주인공 기태(이제훈)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기태의 아버지(조성하)는 아들의 죽은 이유를 쫓고, 관객은 아버지의 시점으로 영화를 바라본다. 학교에서는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며 아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던 기태였지만 영화를 끝까지 따라가면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던 걸 알 수 있다. 기태는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백키와 동윤에게 버려지고,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 <파수꾼>이 쓸쓸한 이유는 그 누구도 기태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기태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찌그러져있었는지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못했고, 동윤과 백키는 기태가 그저 허영으로만 가득 찬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단 한 사람이라도 기태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러면 기태는 외로움의 지옥에서 조금이라도 빠져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이 외로움을 느낀는 이유는 꼭 혼자여서가 아니다. 둘이 있어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살면서 필연적으로 옆에 두고 살아야 할 감정. 그것이 외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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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회사 노조 창립기념일이라 갑자기 휴가를 받은 적이 있다. 옳다고나, 하고 친구를 불러서 술을 한잔했다. 초등학교 때 만나서 안지 햇수로 20년이 된 친구였다. 언제든 술 마시자고 부르면 나올 친구. 나랑 모든 것이 정반대인 친구. 많이 친한 만큼 깊지만, 그 깊이만큼 다른 것도 많은 친구. 그 다름은 우리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서 틈을 만들었고, 20대를 지나면서 달라진 삶의 방향에 따라 공유할 거리가 줄었다. '안 친하다'라고 정의할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지만, 분명 철없이 놀던 20대 초중반의 우리들은 아니었다. 둘 중 누구도 그 시간의 빈공간을 압축해서 정의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되어 있었다.
술병이 늘어나서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친구에게 물었다. "넌 언제 외로움을 느껴?"라고. 친구와 오랜만에 둘이 술자리를 해서인지, 항상 시끄러웠던 술집이 평일이라 조용해서인지, 어쩐지 그냥 묻고 싶었다. 친구는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간 힘들었던 이야기를 늘어놨다. 친구는 최근 1년 정도의 시간을 공부에 투자해야 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선택한 공부의 길이 큰 자괴감으로 이어졌던 모양이었다. 거기에 집안 문제까지 뒤섞여서 자기보다 덜 열심히 사는 지인을 가까이 두며 자위하고 있었다. 잘못된 삶을 복구할 방법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밖에 없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 그게 힘에 부칠 때. 친구는 지금 그런 시기였다. '스스로를 방관하는 모습을 외면하고 싶어서 계속 시끌벅적한 데로 나가는 것 같더라고. 그럼 지금을 잊을 수 있으니까'라며 글썽이며 말했다.
친구는 자신의 외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적절한 위로를 찾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왜 외로운지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은데 아는 게 중요하다며 시답잖게 답했다. 우리는 헤어지고 카톡으로 여운을 나눴다. 친구는 입 밖으로 뱉어본 적이 없어서 외면했을 수도 있는 감정이었는데, 물어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친구에 대해 다 안다고 자만한 적은 없었지만 꽤 긴 시간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건 분명했다. 자신의 외로움을 모른척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어려운 걸 알아서인지 친구의 대답에 내내 마음이 쓰였다. 조금 더 빨리 물어봐 줄 수도 있던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신한다. 그때 친구가 나의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봤던 시간이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게 만들었으리라고. 아주 조금이라도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돌보았다고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