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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야 Nov 26. 2022

X의 번호를 비밀번호로 설정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 띠, 띠" 빨강 불이 번쩍이며 문이 열리지 않는다. 비밀번호를 틀린 것이다.



이 번호를 틀리는 날이 있구나 싶어 잠시 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세 달 전쯤 부모님 집에서 독립했다. 변화에 적응이 더딘 편이라 새로운 환경을 좋아하지 않지만 직장과 집의 거리 문제를 필두로 겸사겸사 독립했다.


아니나 다를까 독립시작부터 우왕좌왕이었다.


옷이 든 캐리어 하나와 작은 가전 몇 개 수저 한쌍 컵을 차에 싣고 혼자 오피스텔로 이사를 가는 나란 사람. 풀옵션이라고 해도 필요한 게 이렇게 많을지 몰랐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런지 운전만 했는데도 고단했다. 공동현관문 비밀번호, 현관 비밀번호까지 숫자를 외우는데 취약한 나는 적어준 종이를 소중히 챙기고 휴대폰 사진까지 찍었다.


부동산 사장님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로 바꾸라고 말해줬는데 집으로 오니 어떻게 바꾸는지를 모르겠더라. 귀찮음에 짐은 풀지도 않고 친구네 집에 가서 짬뽕을 시켜먹고 수다를 실컷 떨다 자버렸다. 다음날 오피스텔에 들러 짐을 정리하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 중 이삼일만 오피스텔에서 지내고 그 외는 부모님 집에서 지냈다. 독립을 했지만 독립을 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그렇게 지냈는데 오피스텔에 갈 때 갈 때마다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는데 외우지도 못해 비밀번호를 적어놓은 휴대폰이 없다면 큰일이었다.


남의 집에서 신세 지는 사람처럼 낯설고 불편했다.


휴대폰으로 도어록 비밀번호 변경하는 법을 검색했다. 방법을 알았는데 드라이버가 필요한 것 같았다.


당연히 드라이버는 없다. 한동안 도어록의 뚜껑을 열 수 없어 비밀번호를 변경할 수 없었다.


한동안이 지나고 드라이버도 필요 없고, 손가락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관리소 직원분이 알려주었다.


비밀번호를 변경하는데 뭘로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내가 절대 잊지 않을 긴 숫자는 주민번호다. 하지만 비밀번호로 적합하지 않다. 단순한 것도 안된다. 순간 x의 번호가 생각났다. 이별 후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지 않아 나를 괴롭게 했었는데, 다시는 누를 수 없던 번호. 누르고 지우기를 얼마나 반복했을지도 모를 그 번호를 당분간 비밀번호로 설정하기로 했다.


 잘 외워지지 않지만 한번 외운 의미 있 숫자는  잘 잊히지가 않는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억하는 걸 보니.


x에게 미련은 없다.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8년을 넘게 만났고, 9년 차에 환승열차 타고 급하게 떠나간 그사람에게 깊은 분노를 느끼던 날도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나에게 도움이 되었으니 상대도 무탈하게 살좋겠다고 생각했다. 환승열차 탑승을 확인했을 무렵 상대에게 탈이 많기를 바랐는데 지금은 나의 마음이 평화롭다. 잊을 수 없지만 나와 가장 관계없을 번호에게 쓰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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