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위 나쁜 사람에게 끌리는 사람들이 있다. 착해 보이고 나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매력을 잘 못 느낀다. 나한테 쉽게 눈길을 주지 않고 밀당도 하며 애를 태우는 사람이 좋다. 연인이 된 후에도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퍼붓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관심과 사랑으로 보답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을의 연애를 하다가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헤어진다.
#2.
어떤 사람은 뭔가 어설픈 사람이 귀엽게 느껴지고 이상하게 관심이 간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곁에서 챙기고 보살피면서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싶다. 나는 한없이 내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긴다. 상대도 나의 세심한 돌봄에 고마워하고 기꺼이 의존해 온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충만감이 차오를 때도 있다. 어느덧 상대는 나의 이런 노력을 점차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면 사랑이 식었다며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의 노고에 무임승차하는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과 불만이 해소할 길 없이 쌓인다. 결국 관계는 파국을 맞이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연애 관계에서 같은 문제를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위의 사례처럼 갈등의 형태가 분명하여 패턴이 쉽게 파악되는 경우도 있지만 좀 더 미묘해서 면밀하게 들여다봐야만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이전 관계에서 연애에 대해 뭘 모르고 미숙해서 그랬다거나 잘 안 맞는 사람들끼리 만났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굳이 패턴이 있다거나 그게 또 문제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내 문제이기 때문에 거리 두기가 잘 안 돼서 파악이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경험 많이 있지 않은가? 내 눈에는 훤히 보이는데 당사자에게는 안 보이는 그런 경험. 혹은 당사자가 이별의 상처가 너무 아팠다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문제를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이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일 수 있다.
연애 경험이 적어서 패턴이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대로 연애를 해봤다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이 한 번일지라도 앞으로 반복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되돌아볼 가치는 있다. 제각기 달랐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연애 패턴이란 것은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A타입에게는 a라는 반응을, B타입에게는 -a라는 반응을, C타입에게는 b의 반응을 보인다면, 이것도 일종의 패턴이다.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하다면,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니까 패턴이 없다고 하지 않고 '강약약강 패턴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연애 자체를 많이 하지 않은 경우는 어떤가. 짝사랑만 한다거나 친구 관계는 좋지만 연애 관계는 원치 않을 수도 있고 관계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도 있다. 관계를 맺든 맺지 않든 간에 지속적인 패턴(특정한 관계 패턴, ‘관계를 맺지 않는’ 패턴)이 내 삶을 제한하고 별로 행복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문제 패턴으로 간주하고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문제라고 우선 정의할 수 있어야 알맞은 해결책을 찾아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
더 큰 문제는, 문제 되는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이를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불에 뛰어들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기어이 뛰어드는 불나방과도 같다. 이런 사례가 어찌나 많은지 프로이트가 “반복 강박”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을 정도다. 대인관계 외상(interpersonal trauma)을 경험한(특히 생애 초기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애착 외상) 사람 중 많은 이들이 강박적 이리라 만치 외상 경험과 유사한 상황에 자신을 반복하여 노출시키는 것 같은 행동을 한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언가에 홀리듯이, 그렇지 않고는 못 배길 것처럼 비슷한 역기능적인 관계에 계속 빠져든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 어디쯤(의식과 무의식은 완벽하게 구분되지 않고 회색지대가 있다고 봐야 한다)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자기 패배적인(self-destructive)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외상적인 관계 경험을 현재 관계 속에 반복적으로 재연하는 이유는 통제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그때처럼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며 상황을 통제하고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사한 상황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 강박을 통해 상황이 나아지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패배적인 관계 패턴이 강화되면서 더욱 통제감 상실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나중에 그는 죽음 본능(thanatos)이라는 검증할 수 없는 가설적 개념을 통해 이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모든 유기체는 필연적으로 무생물로 돌아가려는 자연법칙을 따른다. 사람들은 이러한 법칙에 지배를 받아 궁극적으로 자기 파멸에 이르려는 욕구인 죽음 본능에 이끌려 반복 강박에 빠진다는 것이다.
반복 강박이 죽음 본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정 부분 통제감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일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케이스를 이렇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보다는 반복 강박을 ‘역기능적 스키마’에 기반을 둔 ‘나쁜 습관’으로 보는 것이 더욱 유용하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스키마(도식)라는 것을 개발한다. 스키마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일정한 틀(frame)로, 세상을 보는 렌즈와도 같다. 이러한 스키마는 경험을 통해 구축되는데, 스키마가 형성되는 이유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생존은 곧 환경을 파악하고 예측하고 대처하는 일의 연속이다. 매번 모든 정보를 새롭게 파악해야 한다면 인간의 뇌가 아무리 크더라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사과를 보고 만져보고 먹고 다른 과일이랑 비교하는 경험이 충분히 누적되면 사과라는 ‘개념’ 혹은 철학적으로 사과의 ‘이데아(idea)’가 형성된다. 이제 우리는 사과가 무엇인지 ‘안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 정신적 에너지를 사과가 아닌 낯설고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는 데 쓸 수 있다. 단순한 대상에 대한 개념부터, 보다 복잡한 관계에 대한 이해까지, 직간접적인 경험과 학습을 바탕으로 스키마가 발달한다.
한번 형성된 스키마는 초기 설정값(default)이 되며, 스키마라는 렌즈를 통해 정보가 여과되어 처리된다. 정보는 스키마에 의해 선택되고 편집되고 굴절된다. 스키마는 언어적 요소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요소를 포함할 수 있으며, 스키마뿐만 아니라 스키마에 기반을 둔 정서적 반응이나 행동 패턴(대처 방식, 습관)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특히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경험이나 언어 학습 이후라도 의식적으로 충분히 처리하지 못한 경험에 기반을 둔 스키마가 활성화되면, 몸에 기억된 정보가 자극되면서 강렬하고 생생한 감정이 느껴지지만 어떤 유발요인(trigger)에 의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스키마가 자극되면 뭔가에 이끌리듯 반복적으로 느끼고 행하는 행동 패턴(혹은 대처 방식, 습관)을 보이며, 이로 인해 스키마가 더욱 강화되고 정교화되는 선순환(positive feedback)이 생긴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애착 욕구가 적절히 충족되지 못해 ‘나는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다’라는 스키마를 발달시켰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경험을 하더라도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다. 이러한 경험이 기존의 스키마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칭찬을 받으면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고 칭찬이 진실로 와닿지 않으며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스키마에 맞지 않는 내용은 걸러진다. 내가 칭찬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너그럽고 배려심이 많아서’, ‘나 듣기 좋으라고’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외부 요인에 귀인(attribution)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자신감을 느끼기 어렵고 거부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기 때문에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위축된 행동을 하기 쉽다. 그러한 모습은 남들에게 정말 매력적이지 않게 보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스키마가 자기 충족적 예언에 따라 더욱 정교화된다. 뇌과학 측면에서, 정보처리가 이루어지는 뇌신경 회로를 ‘길’에 비유하자면, 경험을 통해 난 ‘작은 오솔길’이 점차 공고해져서 ‘8차로 고속도로’가 되는 셈이다. 가치관이나 신념, 고정관념, 편견 등이 잘 바뀌지 않는 것도 스키마의 이런 특성과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양육자와 형성한 애착 관계는 이후에 이루어질 모든 관계의 청사진이 된다. 특히 감정적으로 더욱 얽힌 관계일수록(친한 친구나 연인 관계) 양육자와의 애착 관계와 유사한 관계 패턴이 해당 관계에서 재현될 확률이 매우 높다. 자기 패배적인 관계(연애) 패턴이 있다면 어린 시절을 탐색해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A는 부모에게 상처가 될만한 ‘학대’를 당한 적은 없다고 기억한다. 전업주부셨던 어머니가 밥도 잘 챙겨주고 항상 깨끗한 옷을 입히고 학원에 보내 달라고 하면 웬만해서는 다 보내주려 노력하셨다. 다만, 부모님이 자발적으로 애정표현을 하거나 칭찬을 해주셨던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A는 어릴 때 학교 숙제를 혼자 알아서 잘하고 집안일을 도우면 부모님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서도 잘한다’는 칭찬을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면 ‘있는 그대로는 사랑받을 수 없으며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스키마를 발달시키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스키마는 정서적 돌봄이 희박했던 당시에는 나름대로 유용했다. A는 학교에서도 모범적이고 배려심 많은 태도로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연인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기존 스키마가 눈에 띄게 문제를 일으켰다(그전에도 문제는 있었지만 기능적인 부분이 많아 문제가 보상되었을 것이다). A는 독립적인 사람에게는 좀처럼 매력을 못 느꼈고 자신이 뭔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좋았으며 그런 사람들을 주로 만나왔다. 처음에는 상대가 A의 배려와 보살핌을 고마워했고 이러한 반응에 A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감을 느끼며 행복해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연인은 A의 배려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고, A가 바쁘거나 지치고 힘들어서 조금이라도 소홀해지면 A의 사랑이 식었다며 점차 맹렬하게 비난해왔다. A는 이미 자신의 욕구를 뒷전으로 하고 연인을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었지만 연인이 이렇게 나오면 마치 자신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죄책감과 책임감을 과도하게 느끼며 연인에게 더욱 맞춰주려 하고 끌려다니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A를 답답하게 여긴 주변 사람들이 문제를 지적했지만 A는 처음에는 무시했고 나중에는 자신의 사랑의 방식이 비난당하는 것 같아 상처를 느끼며 사람들과 연애 생활에 대해 공유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관계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인식했을 무렵에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고, 결국 관계로 인해 삶이 너무나도 피폐해진 후에야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연애 이후에도 A는 자신의 문제 패턴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자기에게 의존적인 대상을 찾아다니면서 지나치게 희생적인 관계에 빠지는 패턴을 반복했다.
그렇다고 애착 패턴(일종의 스키마)이 전혀 변하지 않는 건 아니다. 초기 환경의 영향력이 강력하긴 하지만 이후에 이루어지는 경험도 스키마를 수정할 수 있다. 양육자와의 안정 애착을 통해 적응적인 스키마를 형성했더라도 기존의 해석 틀로는 처리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 예를 들면 따돌림, 폭력, 상실 등의 외상(trauma) 경험을 하게 되면 이전 스키마를 대체하는 강력한 부정적 스키마, 예를 들면 ‘나는 무가치하다’,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세상은 위협적이다’와 같은 신념 체계가 발달할 수 있다. 양육자와의 불안정 애착을 형성했지만 청소년기에 따뜻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주시는 선생님과의 관계를 통해, 성인기에 연인과 맺은 안정 애착 관계를 통해 역기능적인 스키마가 수정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환경에 일방적으로 영향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비록 자기 충족적 예언의 덫에 자주 빠지기는 하나,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환경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며 나를 위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신경 가소성(neural plasticity, 뇌세포의 성장이나 연결이 변화할 가능성)이 떨어져 변화의 가능성이 이전보다는 줄어든다. 게다가 이미 오랜 세월 경험을 통해 강력해진 스키마를 뒤흔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렬한 경험을 하거나 기존의 스키마를 수정하고 대체할 수 있을 만한 크고 작은 경험을 숱하게 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기존의 스키마는 역기능적일 수 있지만 특히 심리적 수준에서, 나의 자아 감각에 깊게 뿌리내려 있기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어떠한 변화의 시도도 저항감과 불편감을 일으킨다. 스키마에서 벗어난 행동은 잘 떠올리지 못할뿐더러 익숙하지 않은 행동을 ‘선택’하면 왠지 ‘나를 잃는 것 같고’,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은 혼란스러운’ 느낌이 든다. 낡았다는 것을 알더라도 발에 딱 맞게 길들여진 신발이 ‘내 발 그 자체로 느껴지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변화가 어렵고 자꾸만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결국, 본인이 불편함을 많이 느껴야 한다. 불편함을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이를 동력 삼아 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하지만 문제를 인정한다고 해서 변화가 저절로 뒤따르지는 않는다. 과거 경험에 대한 충분한 탐색을 통해 어떠한 스키마를 발달시키게 되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부모 탓, 환경 탓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형성하고 영향을 준 환경을 이해하고 무력했던 내면의 아이를 위로하고 상실 경험을 충분히 애도한 후에야 마음 깊이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경험에 대한 통찰은 변화의 시작일 뿐이다. 의식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을 통하여 점진적인 행동 변화가 있을 때 우리 자신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곁에함께심리상담센터 대표/ 임상심리전문가 백소영
참고문헌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열린책들,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