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자궁수축이 심하게 왔다. 자궁수축이 오면 일반 배 뭉침이랑은 다르게 파열되고 쥐어짜이는 듯한 통증이 수반된다. 병원에 가야 할 기준이란 게 좀 애매하긴 한데 통상 30분 넘게 풀리지 않으면 응급실로 오라고 한다. 어제는 20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수축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누워있었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수축이 풀리는 감각이 전보다 늦게 찾아오고 조금 괜찮아진듯하다가 다시 수축 감각이 찾아오기를 반복했다. 핸드폰이 곁에 없어서 좀 더 불안했다. 요즘 들어 자궁수축이 이틀의 한 번꼴로 점차 빈번해졌다. 오늘로써 딱 임신 23주 차가 됐다.
난임이었다. 고민 끝에 시험관에 도전했고 다행스럽게도 한 번에 아가(들)이 찾아왔다. 자궁벽이 두꺼워지는 병증인 자궁선근증이 있어 착상이 어렵다는 소리를 오랫동안 들어왔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주치의는 한 번의 사이클로 얻은 귀한 3일차 배아 3개 모두 이식하기를 권했고 나도 응했다. 보통 시험관 시술이 한 번에 잘 되기 어렵다고 하여 (잘 안됐을 때) 다시 처음부터 난자 채취를 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긴 했으나 과감하게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난자를 채취할 때는 아플 각오가 되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러나 이식할 때는 아플 거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초음파를 선명하게 보기 위해 방광을 가득 채운 후 초음파 기계로 방광을 심하게 압박했다. 아래에서는 이식 시도를 위한 메탈 장비들로 인해 날카로운 통증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30여 분간 시술이 진행됐던 것 같다. 크게 아플 거라 예상을 못 해서 더 고통스러웠고 시간이 멈춘 것 같았으나 최대한 호흡에 집중하려고 했다.
이식 후 2주 뒤 피검사를 했다. 그 사이 몸이 전반적으로 과각성되었다. 예상치 못한 큰 소리나 시각적 자극에 수시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원래 예민한 타입이기도 했지만 온몸이 알람 버튼인 양 이렇게까지 예민해진 적은 처음이었다. 방광도 과민해져 밤중에 화장실을 수시로 드나드는 바람에 수면의 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컨디션이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컨디션에 임신이 되기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사이 임테기를 해 볼 생각도 못 했다. 주치의가 그동안 임테기 안 해보셨냐며 의아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신체적 변화가 임신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 같다. 피검사 결과 임신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그다음 주에 초음파로 착상을 확인했다. 두 명의 아가가 찾아와줬다. 기쁘면서도 얼떨떨했다.
그러다가 6주에 못 미쳤을 시점에 출혈이 시작됐다. '절박유산'으로 진단됐다. 그 출혈을 시작으로 내가 5주 넘게 출혈을 하게 되리라고는 그때 전혀 알지 못했다. 출혈을 하면 임신을 유지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프로게스테론 약제를 쓴다. 그러나 나는 시험관 시술을 한 산모이기에 이미 프로게스테론 제제를 쓰고 있었다. 출혈이 점차 심해지면서 하루에 한 대 맞던 주사제를 두 대로 늘리고 먹는 약도 추가되었다. (원래 질정도 썼으나 출혈이 너무 심해 의미가 없어져 중간에 중단했다.)
임신 중 출혈이 시작되면 현대의학이 할 수 있는 게 이것이 전부다. (살아남을 아가는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으라는 처방을 받는다. 출혈이 점차 심해지고 있어서 갑작스럽게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1인 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중단되는 상황이었다. 그때는 잠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신을 했구나라고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소위 임신 중 '이벤트'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돌발 상황에 준비되지 않았다. 임신을 슬슬 준비할까 싶었던 2-3년 전쯤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라는 책도 읽었고 나이가 있다 보니 주변 지인들이나 커뮤니티 등을 통해 이런저런 임신 중 이벤트에 대해 듣기는 했었다. 입덧이나 임신성 당뇨, 배가 커지면서 나타나는 신경 통증 정도만 어렴풋이 예상했던 것 같다. 유산 가능성도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소위 '눕눕'의 기간이 기약 없이 지속됐다. 출혈량은 점점 늘고 1주일에 병원을 두 번씩 갔는데 갈 때마다 자궁에 피고임도 점점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3시쯤,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왈칵 하혈이 쏟아졌다. 큰 패드를 모두 적시고 바지와 이불까지 묻어날 만큼 규모가 이전과 달랐다. 병원을 가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가들이 버텨주기를 바라며 그저 무력하게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3시간쯤 뜬 눈으로 있다가 지쳐 잠들었던 것 같다.
하혈의 충격 후 얼마 안 있어 한 아가의 심장이 멈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시기 즈음에 2년 4개월가량 키우던 골든 햄찌가 세상을 떠났다. 나와 남편의 온 정신이 임신 이벤트에 맞춰져 있었다. 당시 나는 24시간 중 22시간 이상을 누워 있었다. 남편은 마침 일이 많이 바빠지던 시점인 데다가 나를 돌보고 내 몫의 집안일도 전부 해야만 했다. 그 사이 떠난 것이다. 나는 둘째 아가의 심장이 멈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아직 나는 남은 아가를 지켜야만 했다. 그런데 웅크려 잠든 듯 떠난 햄찌를 보니 오열이 터져 나왔다.
애도할 여유가 없었다. 남은 아가는 너무 작고 피고임은 이보다 훨씬 컸다. 떠난 아가의 더 큰 아가집도 남은 아가집의 위쪽에 있어 마치 피바다에 고립된 섬처럼 둥둥 떠 있는 형상이었다. 잘못하면 출혈과 함께 아가가 밖으로 쏟아져 나올 수 있다고 했다. 22시간 이상 누워 있는 것이라든지 그래서 허리가 아프고 혈액순환이 잘 안된다는 것이라든지, 2년 넘게 혼자서 열심히 꾸려오던 센터 운영이 사실상 중단된 것이라든지 이 모든 것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알 수 없었다. 주치의에게 물어도 어떤 것을 찾아봐도 모든 게 불확실했다. 그저 아가가 버텨주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불확실한 시간들. 갑자기 정체되어 버리고 고립된 시간들. 두려움과 불안함, 무력감이 수시로 지나갔다.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의 습관이 쏘는 '두 번째 화살'도 자주 아프게 맞았다.
그 시기에 나는 누워서 e-book으로 죽음과 상실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시야가 좁아진 채 내 고통에만 휩싸여 있는 시간이 많아 조금 더 시야를 넓히려는 정신적 운동의 일환이었다. 한편으로 또 다른 상실에 가능성에 대한 마음의 준비이기도 했다. 이 와중에 일부 내담자에 한 해 비대면 zoom 상담을 이어갔었다. 내 쪽의 카메라를 끈 채라 어색할 수 있었지만 고맙게도 기꺼이 상담을 진행해 준 내담자들이 많다. 누워서 약 20여 건의 상담을 진행했고, 클로바 노트 음성 녹음으로 상담 일지를 남겼다. 내담자와의 상담은 내 고통에만 빠져 있지 않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예비 부모가 아닌) 상담자라는 다른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주었다.
가까운 친구들과의 소통도 큰 위로가 됐다. 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자신의 임신 경험을 미루어 보며 내 마음을 헤아려주거나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도 내 입장에서 서서 보려는 노력이 고마웠다. 무엇보다도 남편이 큰 힘이 되었다. 시험관 시술 때부터 모든 진료 일정을 함께 소화했고 더불어 밤낮으로 주사를 맞아야 할 때 모든 주사를 놔주기도 했다. 물론 서로 예민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를 남편이 진정시켜주던 눈빛, 포옹, 목소리 덕분에 마음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시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관계가 더 끈끈해지고 '전우애'가 생겼다.
11주 차가 되면서 출혈이 없어졌다. 출혈이 점차 줄어드는 시기에 불완전하게나마 대면 상담도 재개했다. 누워만 있다 보니 코어 근육이 많이 빠져서 500m만 걸어도 허벅지, 특히 종아리 근육에 알이 배기고 힘들었지만 아이가 버텨줬다는 사실, 전과는 달라진 상황에 감사한 마음이 컸다. 12주차면 소위 안정기에 접어든다고 한다. 출혈이 얼마 전에 끝났으니 12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점점 안정기에 접어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이후 별일이 없었을까?
출혈이 끝나기 무섭게 양수 문제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병원에 계속 수시로 들락거리고 한 달 뒤에는 잠깐 입원도 했다. 만 35세 이상 산모가 흔히 하는 정확도 높은 기형아 선별검사인 니프티 검사도 할 수 없었다. 떠난 아가의 집이 흡수되지 않은 채로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확진검사인 양수검사를 하기에는 아가의 양수가 너무 적어 위험했다. 그러니까 다운증후군을 비롯한 기형아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함도 남아 있다.
그리고 자궁선근증 때문에 자궁이 너무 두꺼워 유연하게 팽창하기 어려워서 그런지 자궁수축이 잦은 편이다. 걸음도 느려졌을 뿐더러 500m 이상 오래 걷기가 어렵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제한적이다. 신체적 제약이 커서 결국 오프라인 센터를 며칠 뒤 접게 됐다. 이점은 내담자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상담자로서의 정체성, 경제적 측면 등에서 아쉬움이 크다. (당분간 추가 상담은 받지 않지만 온라인 상담에 동의하는 기존 내담자에 한해서 상담을 이어간다. 코로나 시대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대면 상담을 선호하는 비중이 크기는 하다.)
임신 중 특별한 이벤트가 없으면 이런저런 변화가 아쉬울 수 있다. 아가에 대한 어떤 기대를 하기도 한다. 나는 본의 아니게 이런 부분이 거의 없었다.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가가 생존해 주기만을 바랐다. 성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몸의 변화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 커리어도 부차적이라 여겨졌다.
최근 3주, 자궁 수축이 좀 더 빈번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컨디션이 가장 괜찮다. 그동안 내담자 외에는 시간을 쓸 수 없었으나 오프라인 상담도 점차 마무리해 가고 있고, 몸이 더 무거워지고 자궁 수축이 잦아지면 신체적 제약이 더 커질 것 같아 11월에는 집중적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조금 살만해지니 나의 직업적 생활과 대인관계가 많이 위축된 점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전보다 빈번히 고개를 쳐든다.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커서 미래를 전반적으로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함이 크다. 하필 남편이 자신의 커리어를 좀 더 활발히 확장하는 시기이기도 해서 더 비교하는 마음이 자주 든다.
이제야 조금 더 크게 드는 마음은, 살아남은 아가와 떠난 아가에 대한 미안함과 살아남은 아가에 대한 감사함이다. 임신 사실을 충분히 체감하기도 전에 유산 가능성이 컸었고 실제 한 아가가 떠났다. 내 마음이 다칠까 봐 떠난 아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남은 아가마저 잘못될 가능성을 계속 열어두었다. 그 탓에 아가가 찾아온 행복과 감사함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그 모든 복잡한 심경으로 16주가 넘어서야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쓰기 시작했다.
17주부터 미약하게 태동이 느껴졌고 지금은 꽤나 활발하다. 내장 쪽으로 발길질을 하면 생리통처럼 제법 아프게 느껴진다. 아가의 움직임이 상실에 대비한 내 마음의 방어막을 뚫고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알려왔다. 미안해졌다. 이렇게 살아남은 강인한 아가인데 그동안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무 고맙다. 이제 아가와의 미래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봐도 좋지 않을까. (아참, 딸이라고 한다.)
떠난 아가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다. 지금은 집중해야 할 시기가 아니라는 마음이 더 앞선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밀어두지 않고 천천히, 할 수 있는 만큼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나는 막달까지 아가를 잘 품고 건강한 아가를 출산하기 바란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이 모든 과정에서 나는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란 없고,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도 결코 당연하지 않다. 소중하고 감사한 것들이 내게 너무나 많이 있다.
여전히 아가가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중후기 유산, 사산, 기형아의 가능성 등)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지금-여기를 충실히 누리고자 한다. 건강하지 못한 아가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환대할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다. 어떻게든 살아지고 소화해 내고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