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의 단상
나는 자율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나를 억압한다고 느껴졌던 환경'들' 속에서 자율성에 대한 기호가 만들어진 것 같다. 나의 감정, 욕구, 소망 등을 억누르는 억압적인 환경들은 자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의무', '책임', '규칙', '규율' 등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순간에도 의무를 다해야 하고,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규칙과 규율 등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자율성이 의무 등과 대척점에 있다고 여기게 된 것 같다. 사실 이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흔한 통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느새 나는 의무 냄새를 풍기는 어떤 것이든지 나다움이나 자율성을 억압한다고 생각하고 반발심을 자주, 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다르다. 여전히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이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선택에 대하여 의무와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둘이 대척점에 있어서 둘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무엇을 의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면 대개는 '마음에 없는데 억지로 노력한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녀를 사랑하고 사랑을 의무라고(의무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러한 사랑은 진실되지 않으며 의무감 없는 '순수한(pure)' 형태의 사랑보다 저차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단어의 정의에 관한 문제일 수 있지만, 사랑과 같은 감정을 표현할 때 의무라는 불순물이 섞여서는 안된다는 순수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너무 고단한 하루를 보내 무척 피곤한 상태라고 해보자. 아무리 힘들어도 아직 어린 자녀에게 밥을 안 차려줄 수는 없다. 그런데 의무감이란 게 섞이지 않은 자발적인 형태의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밥을 안 주지는 않겠지만 억지로 밥을 차리는 듯한 나의 모습에 자녀 사랑이 부족하다고 여길 수 있다. 혹은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상당히 이기적이라 생각되면서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씁쓸하게 배어 나올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의무 없는 순수한 자발성의 개념이 낳는 불필요한 마음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이나 욕구는 컨디션이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할 수 있다. 사랑은 다른 감정이나 욕구보다 비교적 안정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 자녀에 대한 사랑이 일정하게 우러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도 없는데 그런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하지만 은근히 의무가 섞여 있는 사랑에 대해서는 불순하다고 보는 시선들이 있다.
나는 오히려 사랑에 의무를 부여할 때 상대와 더욱 신뢰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의무는 '나는 이런 형태의 사랑을 (느끼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표현하고 행하겠다'라는 나름의 원칙을 웬만하면 계속 따르겠다는 자발적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 사랑의 감정이 일정 수준만큼 차오르지 않더라도 특정한 형태의 사랑의 표현을 한다는 의무를 부여한 사람은 그저 마음이 우러날 때만 사랑의 행위를 하는 사람보다도 안정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고 (불필요하게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음으로써)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자신의 한계를 너무 밀어붙이면서까지 의무를 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는 전혀 사랑을 보답하지 않는데, 의무에만 집착하며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딴에는 사랑의 표현이지만 상대에게 장기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면 그 의무의 '형태'는 되돌아봐야 한다.
참고로, 감정과 욕구가 자주 변하니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감정과 욕구는 잘 살펴야 하지만 모두 귀 기울이며 따를 가치가 있지는 않으며 때로는 그저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한다. 감정과 욕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어떠한 기준이나 여과 없이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결국 나는 자율적으로 의무와 규칙을 내 삶에 들여올 수 있게 되었다. 매 순간의 자율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 순간 의무를 지켜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폭정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변덕스러운 순간순간의 감정을 따르기보다는, 보다 멀리 시선을 두고 나의 가치에 부합하는 어떤 의무라면 기꺼이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더라도 우리가 실천할 의무가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최근 계속해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타자, 특히 나와 많이 다른 타자에 대한 관용과 연대의 노력, 그리고 인류를 넘어 다양한 생명체와의 공존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인데, 이걸 인간이 결국 이기적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개인 수준에서는 그렇게 전혀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만약 내가 그러한 노력을 소위 자율적으로, 마음이 우러날 때, 진심일 때만 기울인다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에게도 마찬가지의 조건에서만 그런 노력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한다면?
개인 수준에서는 소위 순수한 자율성에만 맡긴다면, 이런저런 이유로 이기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부의 양극화, 세대 간, 다른 민족(혹은 부족주의의 '부족') 간 갈등은 심해지고 있다. 이상 기후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기후위기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예견되어 있다. AI와 같은 과학기술이 다 해결해 줄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기술 자체보다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따위는 믿을만 한 것이 못 되며, 우리가 내리는 결단, 어떤 의무와 책임을 기꺼이 지고자 하는지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고 생각한다. 너무 길어지니 이쯤 이야기를 해 두려고 한다.
아무튼 대왕 청개구리였던 내가 의무 등과 친해지게 된 계기에 대한 생각을 풀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