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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Sep 12. 2022

여름의 끝은 아직 멀었어

계절의 기록 #2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내린 날이 있었지만 대부분 아침나절부터 해가 눈부시고 한낮의 기온이 28도를 넘어 거의 30도에 근접해 더웠던 한 주. 많은 준비가 필요했던 인터뷰가 있었고 새로 시작한 그림책 작업의 구상 마감 때문에 바빴다. 계절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지로 산책을 하긴 했는데 자꾸 걸음이 빨라져서 천천히 주위를 감상하지는 못했다. 역시 계절을 즐기고 음미하는 일은 한량의 특권인 걸까. 그래도 매일 매미 소리를 체크하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의 시작은 명확해서 바로 알 수 있지만 어떤 일의 끝은 끝이 실현된 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매미 소리를 처음 들은 날은 바로 일기장에 '올해 처음으로 매미 소리를 들은 날'로 기록한다. 참 간단하다. 하지만 마지막 매미 소리를 올해의 마지막 매미 소리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매일 들었던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들이 한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왜 매미 소리의 끝을 알고 싶냐고 한다면 거기에 대답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여름의 끝이 다가오는 시점이 되면 매일 매미 소리를 체크한다.




9월의 첫날은 오후에 해가 강하더니 저녁 6시가 넘어서 산책을 했는데 공기가 아직도 더웠다. 그래서인지 콧물도 덜 나고 재채기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며칠 만에 호수에 나갔더니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이파리들이 꽤 늘었다. 그리고 오늘의 놀라운 뉴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록색이었던 좀작살나무 열매가 보라색이 됐다. 기온은 높아도 가을은 부지런히 우리의 곁으로 오고 있다.


9월 2일,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쌀쌀한 기운이 없어 반팔에 샌들을 신고 수영하러 나왔는데 딱 적당했다. 기온을 찾아보니 22도였다. 오후에는 28.5도까지 올라갔다. 그동안 여러 번 찾아봤지만 결코 외울 수 없었던 들꽃의 이름을 또 찾았다. 닭의 장풀, 달개비. 색도 꽃잎의 모양도 이렇게 독특한데 왜 이름은 기억에서 쉬이 사라지는지. 8월 내내 꽃을 피우고 있는 분꽃에 드디어 까만 열매가 맺혔다. 친구네 집에 가는 길, 골목에 아직 능소화가 피어있었다.


9월 3일, 오후에 밥을 먹으러 나왔는데 더워서 온도만 따진다면 완전한 여름이라고 선언하고 싶었지만 아파트 단지 대추나무에 성격 급한 대추 한 알이 벌써 혼자 빨갛게 익었고 복숭아 요거트 케이크와 애플 타르트를 같이 먹으며 여름과 가을의 맛을 함께 즐겼으니 여름 80에 가을 20이 섞인 날로 오늘을 기억할 생각이다. 요즘 어디 가나 봉숭아 꽃이 많이 보인다.




9월 4일, 오늘은 비가 내려서 습하고 더웠다. 집안 기온이 계속 27도가 넘고 습도도 70프로가 넘어서 열흘 넘게 가동하지 않았던 에어컨을 다시 켰다.


9월 5일,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내린 월요일. 오전 10시에 망원동에서 인터뷰가 있어서 오전 7시 15분에 집을 나섰다. 평소에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이 정도면 아무리 늦어도 30분은 일찍 도착하겠지 하고 자신의 준비성에 흡족해하며 가볍게 길을 나섰는데... 곧 빗길의 월요일 장거리 출근길이 얼마나 매서운지를 몸소 체험하고 말았다. 버스가 다 만석이라 세 정거장이나 위로 거슬러 올라가 버스를 탔고 평소에 30분 걸리는 길을 한 시간 십분 걸려서 도착했고 그러는 와중에 얼이 빠져서 내려야 하는 전철역을 놓쳐서 되돌아왔고 마을버스가 오지 않아 빗길 속을 뛰어서 인터뷰 장소에 10시 도착. 공복이라 배는 꼬르륵거리고 머리털과 옷은 습기를 머금고 머금어 이제 막 물 위로 건져 올린 해초같이 얼굴과 몸에 달라붙었다. 한시간 반동안 인터뷰하고 촬영하는데 영혼의 한 톨까지 다 시들어버린 느낌이었다. 12시가 가까워서야 당근라페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를 마셨는데 제정신이 돌아오니 몸이 점점 식었다. 집에 돌아오는데 지하철과 버스에서 에어컨이 팡팡 나와서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오후 2시 기준 온도가 18.6도인 데다 비가 오고 바람까지 불어 이러다 감기에 걸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추웠다.







9월 6일, 하늘이 개고 날이 화창하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이 아름답다. 12시쯤에 외출을 하는데 두 마리의 매미가 각각 다른 나무에서 울고 있는데 한쪽에서의 작은 울음이 끝나면 조금 떨어진 나무에서 울리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들렸다. 12시 기준 기온은 24.2도 습도 64프로 북동풍이 살짝 불고 있다. 어제는 추워서 떨었는데 오늘은 다시 반팔을 입을 수 있는 날씨가 되었다.


9월 7일, 수영장 가는 길가에 핀 호박꽃을 바라보며 시작하는 하루. 지지대를 타고 올라간 줄기에 핀 호박꽃 하나가 시들었는데 그 아래로 호박이 기다랗게 자랐다. 8월 초부터 이 자리에서 호박꽃을 본 것 같은데 꽃도 오래가고 예쁘고 벌이랑 나비도 좋아하고 열매도 맛있고 이파리까지 먹을 수 있으니 호박꽃 최고다. 얼마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들꽃의 이름을 검색했는데 참취라고 한다. 이름이 왜 이렇게 웃기지 했는데 참취의 어린잎을 따서 말린 것이 바로 취나물이라고! 참취가 자라고 있는 길에서 비둘기 네 마리가 같이 몰려다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중 한 마리가 바위산에 눈이 내린 것 같이 예쁜 무늬를 하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흰나비와 부전나비와 벌이 잔뜩 몰려있는 곤충들의 핫플을 발견했다. 꿀이 많이 나오는 꽃이라도 핀 건가. 오후 1시가 넘어가니 기온이 28도까지 올라갔다. 아파트 단지에서 말매미 한 마리가 독주를 하고 있다. 합창에는 못 미치지만 '아직 내 계절은 가지 않았어.' 라며 존재감을 뽐내는 듯한 또렷하고 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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