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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Apr 08. 2023

소란스러운 봄과 마음

계절의 기록 #5

차갑고 조용하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밤이 길고 이따금 눈이 내리는 너무 계절이 좋아서 그 사이에 봄이 얼마나 예쁜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만하다. 봄을 잊을 정도로 겨울은 길었으니까. 2월도 중순이 넘어가자 겨울이 조만간 끝이 날 거라는 사실이 아쉽기 시작했는데 막상 봄이 오니 이 역시도 참 좋다. 얼마 전,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예년보다 빨리 핀 벚꽃과 마주쳤다. 그때 나는 봄을 맞아 달라진 신체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겨우내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힘들어 오전에 있는 수영강습의 출석률이 엉망이었는데 3월로 넘어오며 조금씩 몸이 가벼워지더니 춘분이 지나면서는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수월해졌다. 자연스럽게 수영에 대한 열의도 다시 살아났다. 봄이 왔고 꽃은 피고 내 몸도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게 신기했다.


이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내가 노력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 모든 걸 그냥 누리면 된다니. 드물게 미세먼지까지 없어 파란 하늘 아래 벚꽃을 바라보며 수백 번을 걸었던 평범한 장소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행복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혼자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 더 좋았다. 얻어내기 위해 애를 써야만 힘들게 맛볼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 봄을 맞이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낄 수 있는 일상의 기쁨. 그렇게 생각하니 이 봄이 더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갓 구워 따뜻한 베이글과 커피를 사서 근처 작은 공원에 갔다. 벚꽃과 목련과 자목련이 한눈에 들어오는 벤치에 앉았다. 해가 잘 들어오는 잔디밭에는 민들레와 제비꽃이 한가득인데 오전이라 길에는 오가는 이들이 거의 없어 새소리만이 공원에 울려 퍼졌다. 베이글을 베어 물고 커피를 마시며 꽃을 바라봤다. 벤치에 앉아 봄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했고 거기에 먹을 게 있으니 즐거움이 배가 됐다. 익숙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굉장히 낯설고 새로웠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온 일도, 마스크를 벗고 이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도.








꽃들은 조용하게 피어나지만 아무것도 없던 가지에 어느 날 갑자기 분홍, 하양, 노란 꽃잎이 선명하게 돋아나면 공기가 기분 좋게 소란스러워진다. 나도 같이 소란스러워진다. 겨울에는 계절이 주는 묵직하고도 고요한 평온을 혼자 간직했다면 봄에는 작은 꽃잎만 봐도 가슴이 콩콩거려서 누군가에게 기어코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늘어난다. 올해 처음으로 보도블록 사이에서 피어난 제비꽃을 봤을 때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사진을 시끄럽게 찍어댔고 아직 날이 따뜻해지기 전 연못 위에 떠 있는 개구리알을 발견하고는 목소리를 높여 즐거워했고 꽃놀이에서 청설모를 만났을 때는 입을 크게 벌리고 기쁨의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하지만 잊고 있던 봄이 이렇게나 재밌고 귀여운 계절이라는 것에 흥분을 하는 사이에 지난겨울과는 다른 불안이 피어나기도 한다. 나무가 가지를 드러내고 어두운 밤이 길어지며 겨울이 시작되면  공기는 차갑고 묵직해진다. 비가 내리기도 눈이 내리기도 기온이 살짝 올라갔다가 무섭게 떨어지기도 하지만 겨울은 매일매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 춥다. 그리고 길다.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 시린 바람을 들이마시는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겨울의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라 가끔은 이 계절이 조만간 끝이 난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을 때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사계절 중 겨울에 가장 평온한 사람이 된다. 오래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풍경 속에서 나는 계절이 오직 겨울뿐인 행성에 사는 사람이 되어 다른 계절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안정적이고 견고하고 느긋하게 현재를 산다.


봄이 되면 모든 게 급작스럽다. 꽃은 어느 날 갑자기 피고, 날은 또 갑자기 더워지고, 또 갑자기 꽃이 지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모든 변화가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안정적이던 마음은 불안해지고 견고했던 감정은 흔들리고 느긋했던 행동에는 조바심이 싹튼다. 요 며칠 새벽에 일어나면 눈물이 났다. 낮이 되면 다시 꽃을 구경하다가 밤이 되면 또 울기를 반복했다.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봄의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처럼 눈물도 며칠사이에 바싹 말랐다. 웃다가 울다가, 행복해하다 또 불안해하며 봄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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