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고로호 Mar 11. 2024

망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자립작가 지망생입니다 #9

직장을 그만두고 언젠가부터 가끔씩 망했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혼자 밥을 먹다 불현듯 마지막책을 내고  년이 훨씬 지났음을 깨달았을 때처럼. 준비해 놓은 원고도 출판사와 맺은 계약도 없다는 사실이 연이어 떠오른다. 줄줄이 나가야 하는 고양이 병원비와 수술비가 무겁게 얹힌다.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는 가정을 하고 지난 6년간의 월급을 모으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억이 훌쩍 넘는다는 계산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망했다는 느낌은 도로교통표지판만큼 또렷해진다.


그런  기댈  있는 사람을 만나면 망했다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아무래도 망한  같아.”

공무원 시절부터 친한 단짝을 만나 하소연을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직장을 그만둔 지도  됐는데 그동안 이룬  너무 없어.”

공무원 그만두고 운전 시작해서 지금은 차도 몰고 다니잖아.”

, 맞아.”

그러고 보니 수영도 배웠잖아.”

, 그렇네.  수영 이제 모든 영법    알잖아.”

운전이랑 수영     있게 되다니 그것만으로도 언니는 그동안 뭔가 해낸 거야.”

나는 친구의 말에 흔쾌히 설득당했다. 운전과 수영 모두 직장생활을  당시에는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자립작가 지망생으로 새출발을 하며 얻게 ,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기에 시작해   있었던 일들. 일상과 작업이 정체되어 있는 시기에 망했다는 생각이  때면 나는 내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가늘게라도 계속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확인받으며 위안을 얻는다.  





처음에는 망했다는 단어가 떠오르면 무조건 이를 악물었다. 아침부터 아이패드를 가방에 챙겨 카페에 가보지만 이미 나는 실패자로 스스로를 낙인찍은 . 불안과 두려움으로 시야는 좁아지고 머리는 굳어  일도 망쳐버릴 상태다. 세스 고딘은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기 위해서는 일이  풀린 경우를, 모험을 감행했던 가슴 벅찬 시간을, 누군가의 하루를 밝혀줄  있었던 뿌듯한 순간을 떠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쫓기듯 책상에 앉았지만 제대로  뭔가를 만들어내긴커녕 손톱 거스러미만 뜯다 피를 보길 여러  반복한 나는  말이 진실임을 안다. 조바심이 날수록 긴장을 풀고 내가 이뤘던 많은 성취들, 다가올 가능성을 떠올려야만 일이 풀린다.


모든 것은 언제나 일시적이며, 상황은 계속해서 변한다. 단골책방에서   동안 스텝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직장을 그만두며 자립을 위해  자신과 가족에게 약속했던 시간은  2년이었는데  성과 없이 시한을 넘긴 즈음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지 막막해서 일단 외벌이 하는 남편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고 자책도  요량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다. 책방에는 매일 새책이 입고됐고 세상에는 이렇게나 열심히 쓰고 그리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나는 거기   없었다. 그래서일까.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책에 둘러싸여 일하는 최적의 일터였지만 망했다는 느낌이 마음을 넘나들었다.


책방은 출판사를 겸하고 있어서 이따금 출판사와 출간계약을 맺은 작가님들이 책방에 방문해 사장님  편집자님들과 회의를 했다. 그들이 새로 출간될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나는 등을 돌리고 앉아 택배를 포장하거나 노트북에 오늘 입고된 책의 정보를 입력하며 몰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책방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기, 나는 가끔 망했다는 생각을 했고 가끔 글을  브런치에 올렸다. 그때 올린 글은 나중에 책으로 나왔고 책방은 그만뒀지만 그때의 인연으로 일하던 책방  출판사에서 그림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작가로 사장님들과 편집회의를  때마다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림책은 작았지만 기쁨은 거대했다. 망했다는 생각이 드는 시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했던 일들이 예상치 못한 성과로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쁨이었다.





자립작가 지망생 7 차에 접어든 나는 아직 자립과는 거리가 있지만 망했다는 생각이  때를 대비한 선택지를 여럿 만들어놓았다는 점에서 노련해졌다고 자부한다. 그간 만든 책들을 살피며 원고를 쓰면서 즐거웠던 순간들을 상기한다. 성공과 실패보다 중요한 사안은 지금 현재 일을 마주하는 마음가짐이라거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믿지 않는  진정으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등의 문장을 떠올린다. 친구들과 실패에 대해 나누는 농담 섞인 수다는 대부분 효과가 좋다.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있었던 돈의 액수가 눈앞에서 집요하게 어른거리는 날에는 작업보다  진지하고 열심히 연마한 수영과 운전기술을 생각한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나마 운전과 수영이라도 배워놓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여기며.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망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없을 때는 깨끗하게 인정해 버리는 것도 좋다. 망했음을 시인하고 풀이 죽어 고개를 한참 숙이고 있다 보면 결국은  생각이 꼬물꼬물 올라온다. 패배를 인정해야지만 맛볼  있는 홀가분한 새출발.

“망했으니 별 수 있나, 다시 시작해야지. 처음부터.”

매거진의 이전글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연습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