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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조 Jan 08. 2018

'서른'에 대하여

다시금 그 숫자에 주목해야 할 때 - 김애란 <비행운> 中 '서른' 서평

1. 서른이라는 이름


 나이라는 숫자처럼 인간의 인생을 단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나이가 주는 이미지는 매우 보편적이나 그것이 공감과 맞닿을 때 발현되는 효과는 매우 강렬하다. 따라서 많은 문학이나 음악, 영화에서 공감을 쉽게 자아낼 수 있는 대표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서른이란 어떻게 소비되고 있을까.


삼십 세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시인 최승자의 시 <삼십세>는 서른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김광석의 대표곡 <서른 즈음에> 속 서른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다. 많은 곳에서 말하는 서른이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죽어버린 청춘의 표상이며 쓸쓸함이나 지난 세월에 대한 무상함 등의 감정을 담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김애란의 글은 젊다기엔 늙었고 늙었다기엔 젊은 어중간한 상황의 서른-인간이 그 나이에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처한 디테일한 ‘상황’에 주목하게 한다. 여기서 작가의 글은 제목과 비슷한 나이를 가진 독자들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를 확보한다. 서른은 비행운에 수록된 다른 단편 소설과 다르게 편지 형식의 일인칭 시점으로 묘사되고 있다. 서른이 된 ‘나’가 오랜만에 연락 온 고시원 동료 언니 ‘성화’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 서술되는 과정에서 독자는 현실 속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서른이란 줄곧 인생의 변곡점으로 인식되어왔다. 진짜 성인으로서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일종의 두 번째 성장통 같은 삼십 대는 그 나이 때가 되면 번듯한 직장과 독립할 집 한 채가 있어야 하는 단계로 여겨졌다. 하지만 장기적인 취업 불황과 세대 자체에 체화된 불안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그 짐은 고스란히 80년생 세대들에게 전해졌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관적인 세대인 30대의 무거운 공기는 곧 서른을 맞이할 20대에게도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구절이 많은 독자들의 기억에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겨우 내가 된 나’와 ‘겨우 내가 될 나’들이 모여 비행운(非幸運)이 만들어진 시대, ‘어찌해야 하나’라는 물음 앞에 ‘내가, 무얼, 더’라는 외침은 저항이라기보다 비명에 가깝다.     


김애란 저 /문학과지성사(2012)


2. 타인을 희생시켜 얻는 구제


 전 남자 친구에 의해 다단계에 손을 댄 주인공(수인)은 할 수 있는 모든 인간관계에 손을 대 완전히 혼자인 상태가 된다. 그런 그녀에게 연락이 온 건 다름 아닌 학원 제자 ‘혜미’였다. 이미 다단계에 물들 대로 물든 ‘나’는 순진한 혜미를 다단계에 끌어들이고 자신은 그곳에서 빠져나온다. 신자유주의라는 체제 속에 붕괴된 개인이 구제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개인의 희생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에서 현실의 참혹함이 드러난다. 

 ‘나’는 ‘혜미’를 다단계에 빠트리고 그동안 ‘혜미’가 보낸 숱한 구조 요청의 문자들을 외면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편지를 통한 고백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가 ‘혜미’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 무색하리만큼 그녀의 처지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유리벽에 코를 박은 스푸토니크의 개’처럼 조그마한 방의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서울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멀어짐을 느끼는 상황이다. 

 ‘나’가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는 어쩌면 ‘혜미’가 ‘나’에게 보내는 문자처럼 구원을 바라는 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니’로부터 오는 답장을 우리는 책에서 볼 수 없다. ‘나’가 예상한 것처럼 ‘이런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봤다고 할 것’ 같아 언니가 대수롭지 여기지 않을 것 같고 8년의 고시 생활 이후 결혼해 겨우 주변이 잠잠해진 그녀가 ‘나’에게 해줄 것이 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주체가 진짜 주체였던 적이 있었던 걸까. 적어도 <비행운>에서만큼은 보이질 않는다. 모두 어딘가에 자신을 빼앗겨 타자로밖에 살 수 없었던 개인들이 나열된다. 이 소설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타자화 된 일상에 고통받는 누군가가 이 사회에 다수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책에서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는다. 그저 2010년대 사회 곳곳에 떠다니는 비행운들을 아프게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인터뷰에서 비행운의 두 가지 중의적 뜻에 더해 BE 행운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행운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의미라고. 


 <서른>의 편지가 마지막에 다다를 즈음 이런 구절이 있었다. ‘세월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같다’.

 맞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은 언젠가 가겠지. 그러나 화자가 위로받았던 것은 지나가는 세월을 통한 자연적 치유가 아닌 누군가가 날 ‘기억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의 언니로부터 온 편지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찾아온 과거의 내 기록. 그것이 세월 모르게 달려온 ‘나’에게 충분히 살아갈 ‘자격’이 되어주었다. 수인은 혜미를 만나러 갔을까. 



*덧붙여 

한 해가 갈수록 어렸을 적 내가 가졌던 패러다임이 깨져가는 것을 느낀다. 군인 아저씨는 아저씨가 아닌 내 동기였고 '서른이 되면 차가 있고 직장이 있고 가정이 있겠지'란 막연한 짐작은 벌써 코앞이고 나는 그 무엇도 가진 게 없다. 서른이 뭐가 어른이냐? 아직 애지!라는 누군가의 말에 목에 힘을 주며 맞장구쳐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계속 성장하고 싶고 서른에도 멈추지 않고 싶다. 그러나 한켠에서 내가 줄곧 지녀온 패러다임이 말한다. 정착해야지 안정적이어야지 그래야 살아남지,라고. 모르겠다... 나는 패러다임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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