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지 않아요
'식물성 반항'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어 '데모'와 새빨간 표지가 결합된 《아무튼, 데모》.
첫 장을 열면 '무릇 데모란, 민주주의 사회에... 맞서.. 혁명... 이데올로기'같은 단어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긴장하며 첫 장을 열었더니 3M 귀마개가 튀어나왔다.
사계절 필수 준비물은 물, 깔개, 보조배터리, 여행용 휴지다. 그리고 나는 집회장 앰프의 굉음을 못 견디기 때문에 귀마개도 언제나 준비해 가지고 간다(앰프 굉음을 계속 들으면 난청 생길 수 있다). 귀마개는 3M 주황색이 최고다.
- 《아무튼, 데모》中 <준비물>
'데모', '투쟁', '동지'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솔직히 말해 피하고 싶은 단어들이다. 정보라 작가는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첫 장 <준비물>에서 데모에 나서는 사람이 챙겨야 할 사소하지만 중요한 준비물들을 친절히 나열한다. 그녀의 친절함과 다정함에 '데모'라는 소재 앞에서 나도 모르게 올라갔던 마음속 가드가 슬그머니 내려왔다. '데모'라는 단어가 가진 거친 느낌을 다정함으로 감싸준 책이다.
세월호사건이 벌어진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점심시간이었다. 조금 걸어야 하지만 맛있는 짜장면을 먹고 싶어서 10분을 걸어가 도착한 중국집에 앉아 있었다.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단무지 우물우물 씹으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티브이에 긴급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멀리 배가 한 척이 보였다. 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배는 아주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듯했다. '그런가 보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실시간으로 배를 촬영하고 있으니 실종된 배를 찾는 중인 것도 아니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지도 않았으며 한 낮이었다. 사람을 구출해 내는 것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배가 구출될 지의 여부보다 내 짜장면은 언제 나올지가 궁금했다. 그날, 내가 짜장면을 비비고 있는 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름 즈음 지났을 거다. 팀 동료가 세월호 뉴스를 보며 내뱉은 문장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 좀 그만 틀어줬으면 좋겠어." 그 말이 오랜 기간 동안 쌓아두고 꾹꾹 눌러왔던 회사생활의 불합리함, 불공정함, 관계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엮이고 심지어 '잘' 지내야 하는 괴로움을 밖으로 터트려내는 버튼이 되었다. 실제로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몇 년 뒤 사표를 쓰게 되는 결심의 시작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 동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보다, 그걸 듣고 그냥 가만히 있었던 나를 내가 견디기가 어려웠던 거 같다. 나의 몸과 마음이 지금만큼만 건강했어도 그 자리에서 한 마디 해 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가만히 듣고 앉아 있었던 나와 잘 화해가 되지 않았다. 뭐라도 했어야지.
정보라 작가는 스스로 '데모꾼'이라고 칭한다. 내가 뭐라도 했어야지 라는 후회를 안고 사는 동안 그녀는 온몸으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 "유민 아버님이 세종대로 한복판으로 걸어 나가 드러 누우"면, "따라 나가서 유민 아버님 머리맡에"앉아 그를 보호한다. 그 곁을 지나다니는 차들을 보며 "도로에 드러누운 유민 아버님을 치려면 나부터 치고 지나가라고 생각"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오체투지에 참가해 나아가다 버스 바퀴에 짓이겨질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세월호사건도 중대재해기업처벌도 직접적으로 그녀와 관련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보라 작가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이 더 좋은 세상을 향해하다 못해 반의 반 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기"때문에 거리로 나선다. "전반적으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데모해도 크게 불이익이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있는 내가 행진이라도 한 번 더 하고 구호라도 한 번 더 외치고 집회를 할 때 머릿수라도 하나 더 채우면 나와 동지들이 원하는 세상이 그나마 아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과 일치하는 행동이 어떤 로맨스 서사보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녀 안의 인류애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살고 있었다.
정보라 작가는 무려 '부커상'후보작이었던 ≪저주토끼≫의 작가이자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학자다. '데모'란 무엇이며 왜 필요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글에 어떤 '이즘'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데모'속의 사람과 그 사람들의 일상을 조명하고, 자칭 데모꾼으로서 '데모'에 가진 애정을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시위용 현수막에 그림을 그리며 '예수님 끝내주지 않냐!'라고 감탄하며 수녀님들을 근심에 빠지게 한 신부님들, 행진하는 사람의 손을 덥석 잡으며 울음으로 마음을 더하는 사람들, 농성장에 들이닥쳐 “하나님의 뜻을 알아요오?”를 계속 물어대는 취객,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지난 정권에 대한 불만만 외치다가 어느샌가 세월호 농성장의 구호에 스며든 검은 비닐봉지 아저씨. 서로의 농성장을 오가며 품앗이를 하며 부족한 점을 메우는 시위대들. 현장에 깊숙이 관여해 보았던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을 들려준다. 그녀가 하나하나 소개해 준 데모의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빨간 띠의 비장함과 스피커, 교통체증으로만 남아 있던 데모에도 즐거움, 다정함, 유쾌함이 있었다.
책에 담긴 모든 시위들은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시위들이다. 하지만 시위가 벌어져야 때를 놓치지 않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사안에 따라 인생을 걸고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이 직접적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건 당장은 본인의 일터이고 가족일 수도 있지만, 그 행동들이 가져온 변화는 내 삶도 지켜왔다. 무릎이 불편한 우리 엄마가 당연한 듯 이용하고 있는 지하철 엘리베이터, 잠재적 위험이 있는 부위는 제외되고 수입되고 있는 미국산 소고기, 지금 내가 브런치에서 '데모'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하며 글을 쓸 수 있는 자유, 내가 당당히 행하는 '투표'.
미래에도 미리 빚을 지고 있다. 정보라 작가는 연세대 강사직을 그만두면서 연세대에 퇴직금 지급 소송을 하고 있다. 11년간 근무했으니 그에 맞는 퇴직금을 지급해 달라는 내용이다. 승소할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승소한다 해도 소송 비용이 커서 금전적 이득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 작가는 사립대 시간강사들을 위한 판례를 만들려 소송에 나서고 있다. 만약 내 주변의 사람들이 시간강사의 입장이 되었을 때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정보라 작가님과 비정규교수 노동조합 분들이 쏟아부은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정보라 작가님 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내 아이들의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애써주고 있을지 가늠해 보면 하루하루가 빚이다.
아직 무릎보호대와 3M 귀마개를 챙겨 현장에 나설 용기는 없지만, 내 식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고민해 본다. 가을. 데모하기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