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알았다. 같은 책이나 영화를 본 다른 사람들의 결과물에 비해 내 시선은 비교적 비판적이고 반항적이었다. 모르던 바는 아니다. 하지만 원만한 사회생활을 원했던 부모님의 세뇌 덕분에 내 딴에는 억누르고 살아왔다. 보기엔 대체로 순응하며 살아왔지만 머리와 마음속에선 늘 전쟁이었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엄마의 잔소리를 짧게 정리하자면 '나서지 말아라' 또는 '나대지 말아라'다. 1950년생 엄마가 보기에 무슨 일이 생기면 눈을 세모로 뜨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들 것 같은 딸이 위태로워 보였을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든 '신속하고 조용하고 빠르게 진행하는 걸 선호하는 성정 상 시끄러워질 일을 만들 것 같은 딸의 성격이 불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스라이팅의 효과인지 철이 들어하는 생각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우나 그 잔소리 덕분에 '승질 죽이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다여긴다. 하지만 내가 써 놓은 글들을 보니 타고난 저항감은 수십년 가리고 누른다고 없어지는게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이제는 내 이런 모습도 받아들이고 표현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인지 내가 '좋았다'라고 여기는 글들은 대게 저항정신이 담겨있다. 사실 예술가, 특히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들 치고 저항정신없는 사람은 찾아보기 드물다. 올해 노벨 문학상이 누구에게 왜 수여되는가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정 반대에 서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단어는 '순응'일지 모른다. 나는 순응의 반대에 서서 읽기 좋은 글로 저항감을 승화해 내는 능력자들의 글에서 대리만족과 안정감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유교와 자본주의의 단점이 결합된 희한한 세계관속에서 살고 있기에 '저항'에 관해서라면 극단적인 이미지가 익숙하다. 전복하고 싶고 저항하고 싶고 반항하고 싶지만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나지 못해 마음속으로만 앓고 있는 사람들, 혹은 너무 거칠게 드러내서 일상마저 전복해 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도 그 속에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 함께 읽고 싶은 글들을 선정해서 주욱 나열해 보려고 한다.
브런치 북을 발행하려면 영문 주소가 필요하다. 어떤 이름을 할까 찾아보던 중 'The Introvert’s Protest'라는 표현이 있다는 걸 알았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식이 다가오자 뉴욕에 거주하는 예술가 모건 오하라는 시위할 필요성을 느꼈다. 과잉 행동은 피하되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사람들과 함께 헌법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취임식 날 그녀는 펜과 샤프펜슬, 종이, 헌법 사본이 든 작은 가방을 들고 뉴욕 공공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조용히 필사를 시작했다.
이 표현과 캠페인을 알게 되고 무척 반가웠다. 과잉행동 없이 조용하지만 인쇄된 활자로 분명하게 시대의 큰 흐름에 의문을 던지는 글들을 모아 나누어보려는 내 시도에도 비슷한 이름을 붙여 본다. "식물성 반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