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간의 짧은 기행
대 재택근무시대를 맞아 문명의 이기를 누리기 위해 통영으로 왔다.
통영행은 상당히 충동적인 결정으로 서울로 놀러 온 애인이 통영으로 내려가는 날에 함께 따라가겠다고 생떼를 부렸던 것이 시작이었다.
애인은 방해받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사람인데, 최근의 나의 상태를 보고는 기꺼이 통영행을 허락해주었다. 나에게는 도망갈 구멍이 절실했으니까
그렇게 장장 5시간의 고속버스를 타고 남해의 땅으로 왔다.
통영은 도시 전체에 하늘색 페인트를 붓고 투명도를 30 정도로 조절한 곳 같았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묘하게 뭉개져 있었고 먼 곳의 풍경이 뿌연 필터를 낀 것처럼 몽실몽실 했다.
통영은 작았고 느렸고 조용했다.
서울 한 복판에서 온 이방인은 이 작은 도시의 고요함에 호들갑을 떨고 말았다. 여행지와 삶의 터전 사이에는 무한의 영역이 있단 것을 알면서도, 매번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빈약한 경험과 열린 시각의 부재가 빚어낸 절대적인 호의. 여행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다.
통영이 몸을 담그고 있는 남해는 파도가 없는 호수에 가까운 바다였다. 남해는 소담한 매력이 있었다. 유난스럽지 않은 고요한 모습. 바다를 따라 난 산책로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흔한 자전거 한 대도, 조깅을 하는 사람도 마주치지 못했다. 대신 앉아서 볕을 받으며 말없이 시선을 놓고 있는 사람들, 난간에 잠시 기대어 쉬는 사람들, 느리게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유롭고 충만한 모습이 부러워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오래전 부산 영도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해가 져 이미 깜깜한 흰 여울길에는 영도 주민들이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와 다르게 그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엔 오징어 잡이 배가 별과 같이 떠서 빛을 냈다. 가는 가로등 불 밑을 강아지와 뛰고 있는 여자가 지나가는 순간, 나는 다짐을 했더랬다.
이곳에서 살겠다고.
실로 나는 부산에 내려가 4년간 생활을 했다. 밤의 영도에서 보았던 그 그림 같던 기억을 가슴에 품고 호기롭게 시작한 삶이었다. 당연히, 인생은 그림이 아니었기에 아름답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내가 생각한 부산은 이렇지 않았는데 속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리고 미숙한 나는 간과했던 것이지. 강아지와 산책하던 여자가 정말로 여유롭고 행복했었던 건지. 여행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삶의 흔적을 우리는 종종 고의로 무시하곤 한다.
나와 다른 삶의 속도를 가지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니까.
그들의 생활이 어떤 수모를 겪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몇 년이 지난 이곳 통영에서도,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느끼고 싶은 것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라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지만
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