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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Oct 20. 2017

대학로의 붉은 배경

아르코 예술극장 & 아르코 미술관

00 낭만의 거리


내가 중학교 때의 일이다. 조조할인에 통신사 할인까지 얹어서 영화를 2000원에 관람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2000원 정도면 왕뚜껑 컵라면을 3개 정도 사 먹을 수 있는 부담 없는 가격. 주말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친구들과 영화를 곧잘 보러 갔다. 그러다가 개봉한 영화를 모두 섭렵한 어느 날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연극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난 그때 처음으로 대학로의 땅을 밟았다. 사실 그렇게 멀지 않았는데, 그곳까지 갈 일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당시의 동대문운동장 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채 바깥으로 나가기도 전에 대학로에 도착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각종 연극 포스터들이 계단 양 옆 벽을 도배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면 나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연극 예매했냐고 묻는 극단 사람들이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와 친구에게 자기네들 연극에 얼마나 재밌는지 열성적으로 설명해주곤 했다. 곳곳에 보이는 아주 작은 부스들이 시간 맞춰 열리고, 그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을 우리는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소극장은 말 그대로 작았다. 얼마나 작았는지, 손만 뻗으면 배우를 만질 수 있을 만큼 무대와 가까웠다. TV나 영화와 달리 배우와 눈을 마주치면, 그도 정말 날 보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공연 도중 나에게 장난스레 말을 걸기도 했다. 연극의 막바지에 이르면 배우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보였다. 매 공연마다 녹화된 영상을 다시금 틀어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동감이 있었다.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연극의 세계였다.



그 이후로 이따금씩 대학로를 찾아도 그곳은 여전했다. 많은 가게들과 음식점들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몇 년 간에 걸쳐 꾸준히 마니아층을 형성한 식당과 가게들은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걷다 보면 마로니에 공원을 만나게 되었고, 극단의 사람들은 예전과 똑같이 나에게 다가와 예매했냐 물었다.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연극을 볼 사람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곳,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아직은 은행이 노랗게 물들지 않은 가을날, 대학로 거리를 걷다가 문득 이 동네를 감싸고 있는 특유의 활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명동과도, 동대문과도, 강남이나 이태원과도 다른 생동감이 자리하고 있는 곳.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거리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열정'이라는 단어는 싼값에 팔아넘기는 뉘앙스라 쓰고 싶지 않고, '청춘'은 아플까 봐 그렇게 정의 내리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낭만. 이곳은 아직 낭만이 남아 있는 거리, 대학로다.




01 누구든, 언제든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고백하기엔 조금 부끄럽지만, 내 방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물건들이 가득하다. 물건을 눈에 보이는 곳에 족족 놓는 습관이 있어 그렇다. 입었다 벗어 놓은 빨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가 바닥에 나뒹구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 둘 물건들을 이곳저곳에 놓아두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내 방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던 순간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방의 상태가 굉장히 어수선해지고 만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가 되면, 날을 잡고 모든 물건을 다시 수납공간에 꽉 채워 넣어야 정리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방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는지? 크기가 공원만큼 커져도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 대학로에 오게 되면 필히 거칠 수밖에 없는 곳, 마로니에 공원도 같은 문제를 겪었다. 주택가의 작은 근린공원으로 시작해 건축가 김수근으로 인해 공공공원으로 다시금 개장한 것이 무려 1982년. 그 후 30년 동안 마로니에 공원에는 각기 다른 시기에 지어진 시설들과 조형물들이 조금씩 축적되어 갔다.



위의 사진은 2011년도에 찍은 사진인데, 지금과 비슷한 것 같지만 뒤에 화단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는 것이 살짝 보인다.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원래 농구코트도 있었고, 매점도 있었다. 동상도 있었고, 이곳의 모습을 작게 축소해 놓은 금속 모형도 있었다. 많은 것들이 하나씩 내가 방에 물건 놓듯이 생겨났다.



그리고 2012년, 마로니에 공원의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마로니에 공원의 계획은 뚜렷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세월에 따라 쌓여 있던 많은 것들을 치우고, 정리하여 공간을 비워내는 것. 비워내야 이곳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마로니에 공원은 그리하여 싹 비워졌다. 공원 내부의 불필요한 조경 철책을 지우고, 바닥 패턴이 정돈되었다. 가장 중요한 나무들만을 남기고, 사람으로 채워지길 바라면서 시야를 가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제거했다. 



겨울이 지나 나무에 다시 잎사귀가 빼꼼 나오기 시작하면, 마로니에 공원도 같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때로는 위 사진처럼 장이 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마로니에 공원은 그저 공원이 아니라 카페가 되고, 야외 테라스를 가진 레스토랑이 되고, 필요한 물건을 사는 쇼핑몰이 된다. 비움의 힘은 이렇게 나타난다.



바닥 패턴이 그대로 올라와 나무를 감싸고 벤치와 무대의 객석이 되었다. 나무가 존재해야 한다면, 나무와 함께 최소한의 시설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겠다는 의도다. 직각이 아닌 다각형의 패턴은 수학에서의 보로노이 이론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을 충분히 두어 널찍한 영역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라 이해했다.



마로니에 공원은 꼭 공원의 바닥은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은 시원하게 부수어 준다. 오히려 잔디밭보다 더 많은 행위들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울창한 나무들과 그늘이 있으니, 공원이 아닐 리 없다. 그렇게 마로니에 공원은 공사를 거치며 더욱더 언제든, 누구든 품어주는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정리정돈은 필요하다.




02 붉고, 단단하고, 높은


걷다가 문득 앞을 보면 붉은 장벽이 서 있다. 붉고, 단단하고, 높은 바위산이 그 자리에 있다. 아르코 미술관이거나 혹은 아르코 예술극장의 옆모습이다.



대학로 거리를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순간 내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그때 붉은 벽이 보이면 그제야 방향 감각을 되찾는다. 붉은 벽돌이 쌓인 육중한 벽면은 마로니에 공원으로 향하는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만큼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건축가들은 이러한 건물을 '매시브 massive'하다고 표현한다. 조금 더 쉬운 단어가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도저히 대체할 수 있는 한글이 떠오르지 않는다. 창문 없이 이루어진 벽들이 공간을 감싸고 있어 그것이 바깥에서 볼 때 하나의 무거운 돌덩이처럼 보일 때, 매시브하다고 한다. 특히 아르코 건물들처럼 칼 같은 각을 가진 매시브한 건물을 바라볼 때 개인적인 취향으로 나는 감탄한다. 넓은 창문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구성이다.



물론 이 건물의 성격이 미술관과 공연장이라 벽면을 모두 틀어막는 것이 가능했을 테다. 아니, 모두 창문 없이 막아야 옳다. 왜냐하면 미술관과 공연장은 밖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내부에 집중하도록 하는 공간이기 때문.



시간에 따라 붉은 벽돌 위로 다른 그림자들이 내려온다. 때로 나무의 그림자가 이곳을 스케치북 삼아 그려지기도 하고, 해의 각도가 변할 때면 툭툭 튀어나와 있는 벽돌 반쪽 짜리들의 그림자가 그 자신의 길이보다 몇 배는 더 길게 늘어진다. 그럴 때 위 사진처럼 점들의 구성으로 보이지 않고 그 시간만큼은 스트라이프 패턴으로 보인다.




아르코 미술관의 형태는 마로니에 공원과 맥을 같이 한다. 마로니에 공원의 폭만큼, 아르코 미술관은 그만큼 길어졌다. 길게 늘어선 붉은 벽은 그렇게 마로니에 공원의 배경이 되고, 마로니에 공원에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어디론가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모아 둔다.



반면 그 옆에 자리한 아르코 예술극장은 조금 더 다이내믹한 형태로 반복적인 조형미를 보여준다. 돌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땅에 툭툭 박혀버린 듯 생긴 건물의 덩어리가 여러 개. 그것이 계단처럼 반복된다. 공연장의 특성상 미술관보다 조금 더 높다. 정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꽁꽁 닫혀 있다. 위에서 봤던 붉은 벽돌의 벽은 바로 예술극장의 뒷모습이다.




아르코 미술관과 예술극장은 전시를 위한 미술관과 공연을 위한 극장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창이 마로니에 공원을 향하고 있다. 벽돌로 세심하게 감싼 그 모습이 알고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디자인이다. 그래서 창문만 봐도 '아, 김수근이다.' 알게 된다. 


1979년, 1981년 나란히 지어진 이 두 건물이 아직도 벽돌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다시금 유행은 돌고 돌아 벽돌이 건물 외장재로 인기를 얻고 있어 더욱 클래식의 위력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캐드와 같은 드로잉 프로그램 없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자의 모습들을 3D 프로그램 없이 상상하여 그려낸 옛 건축가들에게 탄복한다. 감히 어떤 과정을 거쳐 이 건물을 지었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클래식에는 그러한 맛이 있다. '도대체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것을?'하는 물음을 가지게 하는 감동. 근대 건축에서 아르코 미술관과 예술극장 정도면 클래식이라 칭할 수 있으리라. 




03 보여주고, 들려주는


길쭉하게 마로니에 공원의 배경이 되어 주고 있는 아르코 미술관. 많은 미술관이 여러 전시장을 품고 또 품어 끊임없이 몸을 불려 뚱뚱해지는 것과는 달리 애초에 아르코 미술관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포기한 채 날씬하기로 한다. 이곳엔 로비가 없다.



미술관의 입구. 매표소는 마치 연극 무대의 매표소처럼 작다. 어느 입구로 들어가야 하는지 안내를 받아야 알게 된다. 마로니에 공원을 건물의 뒤편과 연결하고 싶었는지, 김수근 건축가는 건물에 과감하게 구멍을 내어버렸고 로비는 삭제했다. 그래서 전시관은 외부에서 직접 진입하게 된다. 그러니 로비의 모양에 상관없이 전시관이 일렬로 자리할 수 있어졌다. 로비가 따로 계획되어 있지 않은 덕분에 마로니에 공원 전체를 로비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술관에는 전시관이 크게 세 곳. 위 사진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현재 스페이스 필룩스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다. 건축 관련 전시가 열리곤 해서 곧잘 찾게 된다.



스페이스 필룩스 건너편으로 제 1 전시관으로 향하는 입구가 있다. 자칫 지하라 잠시 망설일 수 있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는 그 동선이 맞다. 벽돌로 깨끗하게 감긴 벽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제 1 전시관에 금세 도달한다.



요즘의 전시관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계획되어 있는 반면, 아르코 미술관의 전시관들은 모두 다 따로 논다. 독립적이고, 개인적이다. 아마도 각기 다른 전시를 진행할 수 있도록 모두 떨어뜨려 놨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 1 전시관에서 들어왔던 입구로 다시 돌아 나와 그 옆에 있던 계단을 따라 2층의 제 2 전시관으로 올라가야 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엘리베이터 건너편으로 제 2 전시관이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어디론가 연결되지 않은 채 독립적이다.


제 2 전시관을 둘러본 후 다시 들어왔던 입구는 출구가 된다. 한쪽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며 전시를 둘러보던 습관 탓에 오히려 이러한 공간 구성이 낯설다. 그리고 이곳에서 계단 반 층을 오르면 마로니에 공원을 위에서 관조할 수 있는 아르코 미술관의 라운지가 나온다. 전시 동선의 끝에 선물 가게 대신 라운지가 자리한 셈이다.



마로니에 공원을 이렇게 바라보라고 김수근 건축가는 벽돌 건물에 틈을 내고 창으로 한쪽 벽면을 모두 채웠을 것이다. 라운지는 본래 1층에 있을 법도 한데, 이 풍경을 미술관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굳이 2층으로 올리지 않았을까.



소파에 앉아 마로니에 공원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공원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도록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기에 충분히 편한 소파가 자리를 뜨기 어렵게 만든다.



아르코 미술관 옆으로 계단과 같은 입면을 지닌 또 하나의 건물. 보여주는 데에 더해 들려주기 위한 곳. 아르코 예술극장이다.



언제나 아르코 예술극장 앞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뻥 뚫린 아르코 미술관과 달리 예술 극장의 입구에는 로비답게 비를 막을 수 있는 지붕도 있고, 자리 잡고 앉아 버스킹 하기 좋은 낮은 담벼락들도 있으니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르코 예술극장을 뒷배경으로 이뤄지는 여러 버스킹을 지나 내부로 들어오면 아르코 미술관에서 아껴두었던 진짜 로비가 등장한다.



높은 층고를 가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2층으로 이루어진 극장이니까. 하지만 벽돌을 적극적으로 끌어와 내부 벽면을 외부와 통일하고 높은 층고와 그 천장의 구조를 그대로 노출시킨 점은 기립박수 감이다. 현재의 기준에서 바라봤을 때에도 과감한 설계다. 



난간도 마찬가지로 벽돌로 쌓아 만들었다. 이 정도면 벽돌 장인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르코다워졌다. 공간 속으로 붉은 벽돌이라는 성격이 부여된 셈. 



2층에 올라와서도 같은 붉은 벽돌 벽과 노출 콘크리트 구조 천장이 이어진다. 2층 좌석을 예매한 관람객들이 드나드는 동선이다. 




우연한 기회로 다른 방향에서 무대를 바라보게 됐다. 공연이 있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광경이겠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내 관객 중 하나였던 나에겐 새로운 풍경이다.






학생 때 어느 교수님인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광화문 광장과 서울 시청 앞 광장은 광장이 아니라고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유럽에서 광장이라는 것은 건물들에 의해 막혀 있는 빈 공간으로, 전시가 이뤄지는 미술관 및 박물관과 접하거나 카페나 레스토랑과 맞닿아 사람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행위를 즐기기 위해 머무는 장소를 의미하기 때문. 그러니까 사람들이 광장에서 뭔가를 해야 하는데, 서울의 광장들은 큰 도로에 둘러싸여 있어 그런 행위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광장이 맞느냐는 질문이었다. 광화문 광장과 시청 광장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내는 필수 불가결한 아고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우리 광화문 광장 갈까?" 또는 "오늘은 시청 광장에 놀러 갈까?"라는 약속 제의를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하지 않게 되는 점이 조금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반면, 그렇게 따지면 이곳은 광장이다. 미술관과 예술극장에 접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먹고 마신다.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고, 언제라도 환영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공원보다는 광장일 수도 있다. 



낭만의 거리인 대학로는, 가을이면 노랗게 물드는 마로니에 공원과 붉은 배경인 아르코 미술관과 예술극장이 없다면 홀로 존립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마로니에 공원과 아르코들도 떨어져 있으면 그 힘을 잃을 것이다. 확신한다. 이곳을 기점으로 활동하는 많은 사람들의 낭만이 이 공간들의 시너지에서 나왔음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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