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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Oct 27. 2017

솟아오른 땅

옹느세자메

00 아무도 모른다


성수동에서 회사를 다닐 때, 퇴근 후 종종 들르던 닭발 집이 있었다. 간판이 없어서 언제나 '간판 없는 집'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지도 앱에서 '간판 없는 집'이라고 검색이 되기 시작했다. 간판이 없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던 것이 역으로 그곳의 성격이 되어 이름마저 그렇게 굳어진 것.


그러다 어느 날은 성수동 근처에서 일하게 된 후배와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다가 간판 없는 집 앞을 지나는데, 후배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집 닭발 맛있어."

"여기 쌀국수 맛있어요."


오, 분명 같은 곳인데. 알고 보니 그곳에선 밤에는 내가 알다시피 닭발과 술을 팔지만 낮에는 쌀국수를 팔았다. 내가 보던 메뉴판에는 쌀국수의 쌍시옷도 없었는데, 후배는 몇 번이나 그 가게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그곳이 닭발 집인지도 모르고 있었단다. 겉모습으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고, 내가 보지 못한 이면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100%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불어로 On ne sait jamais(옹느세자메). 한남동을 넘어서 이제 관광객들도 지도를 보면서 찾아오는 유명한 카페의 이름이기도 하다.




한남동의 뒷골목, 내부 모습만 알고 있어 지도를 바라보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뭔지 보이지도 않고, 크고 번쩍번쩍한 간판이 있지도 않다. 무엇도 예상하지 못한 채, 눈 앞에 마주쳐야만 알아보고 '아, 여기구나.' 한다.



멀리서 봤을 때에 그 내부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예상하지 못하도록 겉모습은 수수하게 남겨두었다. 그 이름 그대로, 아무도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01 경계를 허물고자


건축은 어찌 보면 언제나 경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너와 내 땅을 나누고, 분리하고, 구분한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내 땅 안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나눠서 사용한다. 어딘가는 거실로, 주방으로, 서재로. 도면은 결국 경계를 만드는 벽들의 설명서와 다름없다. 이곳을 어떻게 나누고, 서로의 영역을 어떤 식으로 구분하고 막아 내는지에 대한 지침서.


그렇게 건축가들은 경계를 세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일하지만, 그들에게는 이율배반적으로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 공부하라고 하면 하기 싫은 마음이었을까. 건축가들의 고민과 바람은 항상 이런 것이다. 아, 여기를 다 열어두고 싶다. 벽들을 없애서 바깥의 바람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시야를 막지 않고 빛을 들여오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한 고민들 위에 투명하고 열린 공간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시도와 노력이 쌓였다.




옹느세자메에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택한다. 눈에 띄는 간판이 없으니, 사람을 끌어 오는 다른 수단을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공간의 반은 모두 외부로 열어둘 수 있는 큰 창이 계획되었다. 그곳으로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여 지나가던 사람도 붙잡고, 바람과 빛도 들여온다. 요즘처럼 날씨가 좋은 날, 이곳 옹느세자메의 창은 활짝 열려있다. 언뜻 봐서는 창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



창을 본 첫 순간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처음 든 생각은 비쌌겠다는 것. 그만큼 과감한 크기다. 용기라고도 볼 수 있겠다. 기성으로 제작되지 않는 크기이기 때문에 따로 제작을 해야 했을 테다. 열고자 하는 면적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딱 한 번 접었다. 아마도 닫혔을 때 기성 폴딩 도어가 잘게 나누어져 프레임이 많이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 한 번 접히니, 닫혀도 프레임은 중간에 한 줄만 지나가니 겨울에도 깔끔한 모습으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외부에서 창호는 내부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역할을 하지만, 내부에서는 최대한 많은 햇빛과 바람을 들여오는 데에 목적이 있다. 한남동의 뒷골목이 바로 옆에 펼쳐진다.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그대로 맞는다. 작은 공간이지만, 외부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02 솟아오른 땅


이것은 땅에 대한 동경에 가깝다. 건축가들이 다양한 높낮이의 땅을 만들어 내는 것 말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는 때가 있다. 인간은 점처럼 작아지지만, 땅은 무한히 팽창하 듯 느껴지는 순간. 그러한 감각과 기억이 만들어 내는 땅에 대한 동경은 건축가의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돌연 이곳에 와 안착했다. 최대한 평평해야 할 땅이 솟아올랐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분명 카페인데 의자도 없고 번듯한 테이블도 없다는 뜻이다. 땅은 마치 목욕탕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솟아올랐다. 그 모습 그대로 사람들이 걸터앉을 수 있는 의자와 벤치가 되었다. 언제든 뜯어낼 수 있게 나무로 구조를 짜서 올린 것이 아니라, 진짜 콘크리트다. 되돌릴 수 없는 진짜 땅.


방석이 준비되어 있기는 하나, 그것이 꼭 절대적인 것인 아니라서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는 곳에 가서 원하는 방향으로 앉는다. 그러니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풍경이 계속해서 달라진다. '아무도 모른다'는 이름처럼 공간도 사람들의 움직임을 강제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도 처음 사진으로 이 공간을 접했을 때, 목욕탕 같다고 생각했다. 푸른빛이 도는 녹색 타일이 바닥과 옆 벽을 모두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 속에서 목욕탕을 꺼내고 만다. 더운 여름에는 차가운 물이 받아져서 족욕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물은 담기지 않는다. 대신 사람이 가득 담긴다. 



똑같이 생긴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푹 파인 한 공간을 서로 공유하다 보니, 조금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다른 카페 같으면, 같은 돈을 지불하고 일정한 넓이를 가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텐데 이곳에서는 사람이 없으면 더 넓은 영역을, 사람이 많으면 작은 공간을 소유한다. 공간은 유동적으로 나누어지는데, 그러니 옹느세자메를 방문할 때에는 사람이 없는 시간을 추천한다. 더 많은 영역을 영위할 수 있을 테니.



2년의 세월 동안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계속하여 밟히면서 충격을 받는 부분이다 보니 타일이 군데군데 찍히고, 까였다. 그래서 더 오래된 목욕탕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역시 들뜬 타일을 보면 안타까움이 먼저 든다. 또한 이것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의 문제은 아니지만, 바닥과 벽의 타일이 딱 들어맞지 않아 줄눈이 겹쳐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



옥빛의 땅은 벽돌이 뒤에서 잡아준다. 가게에 새로 들어오는 손님과 구분하여 편히 등을 기댈 수 있도록, 동선을 만들어 주는 벽이 하나 세워졌다. 붉은 벽돌을 세로 줄눈 없이 단단하게 쌓았다. 손님들이 머무는 공간에서 빵을 만들어 내는 작업실로 이어지는 벽면 하부도 같은 재료로 마감했다.




03 공간의 맞춤법


나에겐 몇 가지 강박이 있다. 그중 하나가 맞춤법에 대한 것인데, 카카오톡을 하다가도 맞춤법을 틀리는 경우를 보면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아주 굴뚝같다. 친한 친구라면 별표를 붙이고 옳은 맞춤법으로 교정해 주고야 만다. 친구인 빔과 양양과는 서로 맞춤법 지적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맞춤법을 받아들이겠다고 합의도 보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갑자기 맞춤법 검색에 돌입해서 어떤 표현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토론도 늘 벌인다.


그게 아니라면 시각적인 강박이다. 도면을 그리고, 시각적인 디자인을 계속하다 보니 오와 열이 맞지 않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불편하다. 보이지 않는 선들이 일치되어야 한다. 서로 다르고 싶으면, 다른 데에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특히 폰트 같은 것들이 들쭉 날쭉하다가 굴림체까지 나타나면 숨이 막힌다.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고 지나칠 일인데도 굳이 그걸 맞추겠다고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건축의 경우에는 이런 것이다. 재료도 그렇겠지만 공간과 가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공간의 맞춤법이라 하겠다. 공간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따라 가구는 그 공간에 딱 맞게 들어갈 때 아름답다. 그래서 때로 건축가들은 공간에 맞는 재료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옹느세자메에서도 그러한 가구들이 발견된다.



옹느세자메에서 자리를 잡고, 커피와 케이크를 시키고 자리에 와서 앉으니 양 옆으로 철제 프레임으로 제작된 테이블이 보였다. 테이블이라는 말보다는 상(床)이 더 어울린다. '밥상' 할 때의 그 상. 분명 저대로는 커피를 올려놓지 못할 텐데. 주변을 살펴보니 다들 잘만 커피와 케이크를 올려놓고 먹고 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주문한 커피와 케이크가 도착한다. 쟁반에 얹혀 도착해서는 비어있던 프레임을 채운다. 그제야 커피 상이 완성된다. 내가 만났던 카페의 테이블 중 가장 옮기기 쉽고, 가볍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땅이 이루는 형태의 색이 워낙 강해서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다면 아마 그 둘이 충돌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구는 최대한 보이지 않길 원했다.


 


옹느세자메는 바로 이곳, 목욕탕을 닮은 공간에서 시작해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맛있는 디저트 카페로 입소문을 통해 알려졌지만, 처음에는 특이한 공간의 생김새가 옹느세자메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일조했다. 사람들은 사진을 보고 호기심을 갖고 한남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간판 없이 널리 알려졌다.


옹느세자메는 어떻게 건축이 카페의 구조를 바꾸어 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이다. 천편일률적인 카페 인테리어 속에서 조금은 다른 시도를 해냈기 때문에 공간만을 보러 방문해도 가치 있는 곳이다. 맛있는 커피와 케이크는 덤.





브런치 글에 예전에도 썼듯이, 나는 흙담 프로젝트부터 이곳을 설계한 건축가인 푸하하하 프렌즈의 팬이라 그들의 작업을 보러 다니기를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작품이 또다시 지어지기를 언제나 기대하고 있다. 가감 없이, 어려운 수사 없이 쓴 그들의 글을 읽어보아도 좋겠다.


http://fhhhfriends.com/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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